[커버스타]
투명한 푸르름이여, <고양이를 부탁해>의 이요원
2001-06-13
글 : 김혜리
사진 : 오계옥

“너는 한 송이 꽃과도 같이 귀엽고 아름답고 순수하구나. 너를 바라보면 괴로움은 내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참으로 난해한 문장.

어째서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데 괴로운 것일까? 얼마 전 막을 내린 TV드라마 <푸른안개>의 신우는, 어렸던 우리가 이해할 수 없었던 어느 독일 시인의 시구를 한순간에 해명해주었다. 시냇물 같은 생머리를 찰랑이며 힙합 노래를 흥얼거리는 이요원(21)의 신우는, 투명에 가까운 푸르름으로 그녀의 ‘아저씨’를 깊이 병들게 했고, 둘을 연민으로 바라본 사람들의 가슴에도 데인 자국을 남겼다. 지나는 뱃사공들을 소용돌이에 빠뜨려 심연으로 이끌었다는 로렐라이의 처녀처럼. 신우의 눈물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걷힌 며칠 뒤. 땡볕이 내리쬐는 초여름 정원에서 이요원을 만났다. 그녀를 만나기 전, 주변의 아주 많은 이들이 그녀가 매우 예쁘다는 의견을 들려주었고, 몇몇 사람은 그녀가 씩씩하고 대범하다고 말해주었으며, 그녀를 근거리에서 보았던 한두 사람은 그녀가 아주 총명하다고 귀띔해주었다. 파리하고 무심한 얼굴로 나뭇가지 같은 팔다리를 흔들거리며 뜰로 걸어 들어온 이요원은, 준비된 의상 중 신발이 빠진 사실을 발견하자 툭 제안했다. “맨발로 가죠!” 그 순간 생각했다. 그녀에 대한 말들은 어쩌면 전부 맞을지도 몰라.

곧 완성될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와 막 완결된 표민수 PD의 <푸른안개>는 이요원이 배우로서 처음 프레임 중심에 선 주연작들. “어떤 배우들은 주연이 아니면 결코 캐스팅할 수 없다. 이요원은 그런 케이스인 것 같았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오디션에서 이영진과 이요원, 강하고 멋진 소녀 둘을 두고 끝까지 고심했던 민규동 감독의 기억을 빌리자면, 이 젊은 배우는 이제야 타고난 별자리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성인식 치르듯, 갑자기 한 영화와 드라마를 가느다란 어깨에 짊어지고 한 계절을 지낸 이요원은, 가벼운 멀미가 나는 눈치다. “이토록 어렵게 연기한 적이 없었어요. 잘하진 못해도 자연스럽게는 해왔는데. 이제는 한 영화가, 드라마가 저 하기에 따라 망가질 수도 잘될 수도 있는 거예요.” <고양이를 부탁해> 포스터 촬영하고 방송 카메라 앞에서 “영화 보러 오세요”라고 인사하면서 이요원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보러 오라 그래놓고 연기가 엉망이면 어쩌나. 집들이를 앞둔 주부처럼 긴장하고 말았다.

영화로 말미암아 이요원이 택한 첫 번째 ‘이상한’ 기분은 데뷔작 <남자의 향기>에서였다. 아역배우 출신인 상대역만 연신 칭찬받자 오기가 나서 눈물을 글썽였다가 우는 연기 잘했다고 칭찬을 들은 첫 경험이었지만 수십명의 스탭이 자신의 동선 하나에 집중해 사인을 기다리는 충만한 그 찰나에, 소녀는 난생 처음 그 무엇을 느꼈다. “희열이요.” 잠깐 생각하던 이요원은 그 단어를 고른다. “그때 결심했어요. 아, 나는 영화해야지.” 일급 배우들과 공연하는 것만으로도 큰 수업이었던 코미디 <주유소 습격사건>을 거쳐, 요새 이요원은 네명의 또래와 퀼트 꿰매듯 찍는 앙상블드라마 <고양이를 부탁해>의 단독신 촬영에 열중하고 있다. “다른 친구들은 몰라도, 저는 정말 어렵게 하고 있어요”라고 고백하는 이요원의 캐릭터 혜주는 친구 중 혼자 인천을 떠나 서울의 증권 회사를 다니며 커리어우먼의 생활을 동경하는 아이. 언뜻 보기엔 깍쟁이 허영 덩어리지만 혜주에게는 신우와는 또다른 음영이 있다. 태희(배두나)처럼 담백하지도 못하고, 지영이(옥지영)처럼 침묵을 통해서나마 ‘나, 이렇게 힘들어’라고 은연중에 SOS 신호를 보내지도 못하는 혜주는 실은 몹시 외롭고 예민한 소녀다. 그런데 이요원은 혜주에게 불만이 많다. 다른 인물은 다 알겠는데 혜주만은 절대 모르겠다고 한다. “혜주는 마음을 말하는 대사도 없고 의미없이 스쳐가는 행동이 많아요. 게다가 얘는 상대에 따라 계속 변해요. 친구 앞에서, 언니 앞에서, 남자 상사 앞에서, 여자 상사 앞에서, 혼자서, 사람이 다 달라요.” 단독장면을 연달아 찍는 요즘에야 “얘, 참 외롭고 불쌍한 애구나”라는 감이 잡혀 이 신들부터 찍었으면 좋았을 걸, 아쉬워하고 있는 참이다.

그러나 이요원에겐 아쉬움은 많아도 후회는 없어 보였다. 질문을 하면 시원시원 받아넘기지만, 촬영현장에서는 사내아이처럼 변명도 핑계도 없이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지시에 끄덕이며 연기하는 그녀. <푸른안개> 최종회도 다시 찍고 싶고 <고양이를 부탁해>의 연기도 벌써 반성하고 있을 만큼 엄격하고 냉정하지만 ‘연기는 곧 내 삶’이라는 식의 섣부른 헌신을 맹세하지는 않는다. 아니 거꾸로 그녀에겐 영화가, 연기가 자기를 싫다고 하면 “너, 나 마음에 안 들어?, 좋아!” 하며 휙 돌아설 듯한 기백이 있다. 바로 그 하드보일드한 기백이 더 사납게, 어떤 유보조항도 없이 카메라와 드잡이를 벌이는 젊은 여배우를 이요원에게서 기대하게 만든다. 맨발로 물가에 서 있는 버드나무 같은 그녀. 그 가지를 마구 흔들어 엉클어놓을 광풍을 내심 기다린다면 너무 사악한 걸까?

그녀의 영웅 | 뭐든 한번 ‘꽂히면’ 오래 간다는 이요원이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열애한 인물은 서태지. 신보에서 <탱크>라는 노래가 제일 좋다는 그녀에게 서태지 본인이 제일 아끼는 곡도 <탱크>라더라 전해주니, ‘태지 오빠’랑 통했다고 뒤로 넘어갈 듯 환호작약한다. 이요원은 그녀의 영웅에게서 아티스트의 태도를 배웠다. “그에게 음악이 있듯 제가 하고 싶은 건 연기예요. <푸른안개> 이후 쇼 출연 섭외도 많이 왔지만 거절했어요.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느니 연기를 통해 만가지를 보여주는 쪽을 택하겠어요. 난 한 우물만 파도 물을 찾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예요.”

그녀의 스무살 | “혜주처럼 나도 현실적이었고 꿈이 컸고 열심히 살려 했어요. 서울에 나와 혼자 직장다니는 혜주는 친구들에게 자기 생활을 이야기하지만 이해받지 못하죠. 학교를 다니며 일을 했던 나 역시 아이들에게 다는 이해받지 못했어요.”

그녀의 네 번째 영화 <아프리카> | 스무살 여자애들의 황당무계하고 재미난 이야기라는 신승수 감독의 <아프리카>가 이요원의 차기작. 한 무리의 친구들을 이끄는 민선 역으로 늘 하고 싶던 와일드하고 멋진 여자 연기를 하게 됐다. <푸른안개>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영화라 끌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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