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94kg 똥배의 ‘설경구’, <역도산> 일본 촬영현장
2004-07-08

"이제 나이도 있고 해서 1년 넘게 싫다고 도망다녔는데, 그러면 너 말고 차선책이 있다며 '바로 설경구 너다'라는 차승재 싸이더스(영화 '역도산' 제작사) 대표의 말에 그만 넘어가 역도산 배역을 맡게 됐습니다." 설경구(36)가 거구의 역도산으로 변신했다. <오아시스>, <실미도>에서의 마른 몸은 온데간데 없고 제법 볼록 튀어나온 똥배까지 자랑한다. 심지어 허리를 굽혔을 때 손가락이 발에 닿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그렇지만 설경구의 얼굴에는 자신의 몸에 대해 그렇게 싫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완전히 몰입한 모습이다.

사실 설경구는 영화계에서 고무줄 몸무게로 유명하다. <오아시스>를 찍을 때는 살을 빼기 위해 일산에서 충무로까지 하루 6시간 이상씩 걸어다니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역도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7월 <역도산>에 캐스팅되면서 근육질로 무장한 거구의 몸집을 만들기 위해 하루 4시간 이상씩 운동을 하면서 근육강화식품을 섭취하는 식이요법을 통해 근육을 키우며 맹훈련을 했다. 그러다 짜증날 때면 저녁에는 술로 배를 채웠다고 한다. 그래서 73㎏이던 몸무게는 현재 94㎏으로 늘었다. 그는 이렇게 만든 몸으로 앞으로 196㎝의 키에 체중 140㎏이 넘는 실제 일본 프로레슬러를 거뜬히 들어올리는 장면을 찍을 예정이라고 한다.

몸을 일단 만들자 다음은 언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역도산>에는 주인공인 설경구와 연출을 맡은 송해성(40) 감독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의 출연진과 스태프들이 일본인인 탓에 촬영장에서 주고받는 대화와 대사는 모두 일본어를 사용한다. 이 때문에 <역도산>에는 역도산이 유일한 조선인 친구가 운영하는 불고기집을 찾아가 술을 마시는 장면과 한국인 제자인 김일에게 레슬링을 가르치는 장면 등 한국어 대사가 들어가는 장면은 딱 두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언어 장벽은 이 영화 제작의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이 문제도 그는 시원하게 마무리지었다. 제작진의 걱정을 깨끗히 잠재웠다. 5개월에 걸쳐 녹음기를 끼고 살며 일본어 배우기에 나서 지금은 함께 출연하는 일본 배우들조차 설경구가 외국인 연기자라고 생각 못할 만큼 수준급의 일본어 실력을 뽐낸다고 한다. 그의 일본어 구사능력이 향상된 데는 촬영 중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성심성의껏 일본어를 지도한 일본 배우들의 도움도 한몫했다.

송해성 감독은 "일본 연기자들이 감정이입을 하는 데 크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설경구의 일본어 연기가 뛰어나다고 칭찬한다"고 전했다. 사실 설경구가 일본어 대사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경우 제작진은 일본 배우를 섭외해 더빙을 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죽기보다 싫다"며 설경구는 거부했다. 자기 목소리로 연기하지 않는 배우는 연기자가 아니라는 자존심과 고집을 부린 것이다.

설경구는 일본 현지 로케가 50% 이상을 차지하는 촬영에서 "처음에는 국내에 세트를 만들어 찍으면 되지 왜 일본에까지 와서 사서 고생하는지 모르겠다"고 내심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일본에서 현지촬영을 한 게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현지 분위기도 그렇고 연기하는 데 정말 도움이 됐다고 확신하고 있다고 한다. 힘든 일본어 배우기, 살인적인 체중조절, 고난이도 레슬링 기술 익히기, 낯선 땅에서의 고된 생활 등 실제 역도산과 똑같은 삶의 과정을 일본 현지에서 겪은 설경구가 보여줄 역도산의 인생이 기대된다.

<역도산> 연출 송해성 감독 인터뷰

삼류 건달의 밑바닥 인생을 밀도있게 그린 영화 <파이란>으로 국내외 평단에서 호평 받았던 송해성(40) 감독이 3년 만에 <역도산>으로 다시 메가폰을 잡았다. 왜 역도산인가. 사실 송 감독이 처음 구상했던 작품은 <역도산>이 아니었다. "<파이란> 이후 처음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동양 챔피언인 강세철과 천재 복서 허버트강 부자의 가족 이야기를 그린 권투영화를 찍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2002년 초 우연히 본 사진 한장으로 송 감독은 이 영화는 다음에 만들기로 하고 바로 엎었다. "이 사진은 역도산이 프로레슬러가 되기 전 일본 스모선수 시절입니다. 21살이나 22살 때 한 여성 팬과 찍은 흑백사진이었는데 역도산은 이 사진 속에서 따가운 햇살 탓인지 눈을 뜨지 못하고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었지요. 그 사진을 보자 왜 이 사람은 웃지 못하고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져 있을까, 궁금증이 일어나면서 역도산의 인생을 추적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끓어올랐습니다."

아마 이런 욕망이 생긴 것은 역도산의 삶이 송 감독 자신의 인생역정과 어딘가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송 감독은 고교시절 시쳇말로 문제아였다고 한다. 7녀1남 중 막내로 태어난 송 감독은 고교를 중퇴했다. 혼자 학업을 중도하차하는 게 아쉬워서인지 친구를 꼬셔 같이 중퇴했다고 한다. 그리고 검정고시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그래서 누구보다 <하류 인생>에 정통하며 그 정서를 잘 안다고 평가받고 있다. <파이란>은 송해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영화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송 감독은 곧바로 <유령>, <무사>, <화산고>, <살인의 추억> 등을 제작한 영화제작자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를 찾아갔다. 15년 넘게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사이인 덕분에 둘은 금방 의기투합했다. 송 감독은 일본으로 건너가 자료 수집과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고, 차대표는 일본 쪽 파트너를 물색하고 역도산 유족을 만나 영화화 권리를 획득했다. 당시 일본에서도 이미 5군데에서 <역도산>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 <러브레터> 등을 프로듀싱한 일본제작자 가와이 신야와 손잡기로 했다.

송 감독은 주인공으로는 일찌감치 설경구를 점찍었다. 1년을 넘게 버티며 마다하던 설경구를 설득해 끌어들이고 지난 3월 초 한국에서 첫 촬영에 들어갔다. 송 감독은 실존 인물을 스크린에 옮기는 작업이지만 결코 일대기를 밋밋하게 펼쳐놓는 전기영화로는 만들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무려 1년반에 걸친 수정작업을 거쳐 직접 각본을 쓴 송 감독은 "어려운 시대를 몸뚱아리 하나로 치열하게 살다간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욕망과 진심을 그려내겠다"고 말했다. 차대표는 "지금은 메말라 버린 옛날 남자의 물컹물컹한 감정이 살아있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옆에서 거들었다. 송감독 자신이 속내를 공개하듯 진심을 담아 만드는 <역도산>이 기대된다. (일본 다케하라·미로쿠노사토=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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