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동화적 치유의 판타지, <인어공주>
2004-07-14
글 : 박유희 (영화평론가)

모든 사소한 것들을 경배하는 <인어공주>

영화 <인어공주>는 뻔하다. 우연히 낯선 세계에 빠져들어 과거의 엄마를 만난 주인공은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는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뻔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인어공주>에는 호기심을 유발하는 구석이 있다. 또한 뻔한 걸 재미있게 보게 하는 힘이 있다.

낯익은 동화적 서사

앨리스는 토끼를 따라 구멍 속으로 빠져든다. 앨리스가 모험에서 깨어났을 때는 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 잠에서 깨어난 앨리스는 일어나 그저 언덕을 뛰어내려가지만, 이미 꿈꾸기 전과 똑같은 아이는 아니다. 자신이 꾸었던 꿈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현실과 꿈의 경계에 대해 의식적으로 물음을 던지는 아이로 성장해 있는 것이다. 이같은 성장담의 구조는 소설이나 영화를 포괄하는 대부분의 서사 장르에서 일반적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동화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살았대요”라는 안정과 평화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다른 장르와 어느 정도 변별된다. 그 결말은 대부분 가족의 회복으로 통한다.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이런 이야기를 밤마다 들으면서 가슴 졸이고, 안도하고, 기뻐한다. 오히려 이야기를 몇번 들어본 아이일수록 그 감동은 더 커지곤 한다. 반복되는 이야기에 대한 반복적인 기대는 인간이 이야기에 가지는 보편적인 기대 중 하나이다. 영화 <인어공주>는 이러한 기대의 지평에 놓여 있다.

현실이 지겨운 나영이 꿈꾸는 것은 연수 기회로 주어진 뉴질랜드 여행뿐. 그러나 나영이 이 여행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처음에 이미 암시된다. 사진에서 살아 넘실대는 뉴질랜드 바다 위로 목욕탕이 오버랩되며, 어머니가 얼굴을 내미는 것이다.

많은 동화에서 가출은 어머니 때문에 발생한다. 대개의 경우 아버지는 처음부터 없거나, 있어도 ‘너무 착해서’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인어공주>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와 딸을 생활 전선으로 내몰고, 담배만 피워대다 이제는 중병에 걸려 가출까지 한다. 아버지를 찾지 않는 어머니 때문에 나영이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나영이 뉴질랜드 여행을 포기하고 배를 탈 때, 여행은 나중에라도 갈 수 있다고 되뇔 때, 그녀는 이미 부모의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며 서사의 방향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화해로 정해진다.

길은 다른 세계로 열린 통로이자 집으로 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향 섬의 낯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우체부가 젊은 시절의 아버지 진국으로 변하며, 나영은 자연스레 과거로 빨려든다. 나영은 여기가 어디냐고 묻지도 않고, 연순과 진국도 나영이 연순과 닮은 것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는 관객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팅커벨의 가루를 묻히고 웬디가 날아올랐을 때 아이들이 “사람이 어떻게 날아?”라고 묻지 않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팅커벨의 가루를 묻혔으니까.

사소함의 재발견과 웃음

나영이 빠져든 세계에는 긴박한 모험도, 놀라운 사건도 없다. 모든 사건이 단조로워지며 환상의 세계는 진국과 연순의 감질나는 사랑이 엮이는 작은 공간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이 환상은 나영의 몽상 범위로 한정된다. 나영이 과거로 빨려들 때나 현재로 돌아올 때 만나는 인물 중에 나영의 시간 여행을 증명할 사람은 없다. 과거의 공간에서는 나영이 끼어들 수도 관찰할 수도 없는 상황, 연순과 진국의 은밀한 만남까지도 포착된다. 나영이 과거 여행을 했다는 증거는 한겨울에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잠시 모호하게 하여 관객의 감각을 교란시키는 장치이다. 이러한 교란은 당황스러움을 유발하며 재미를 형성하지만 익숙한 방식이기에 크게 주목을 끌지는 못한다. 다만 익숙하고 편안한 서사의 일부를 차지할 뿐이다.

익숙한 구성에 친절한 암시, 놀라울 것 없는 속임수로 안정된 서사를 구축하고 있는 <인어공주>에는 반전이랄 게 없다. 그 대신 웃음은 있다. 칸트에 의하면 웃음은 무언가를 기대하다가 뜻밖의 결과가 나타날 때 긴장이 풀리면서 나타날 수 있는 반응이다. 그렇다면 <인어공주>는 예상을 뒤엎는 착상으로 관객을 웃기고 있는가? 진국과 연순이 빚어내는 사랑은 웃음을 유발하는 에피소드의 나열로 구성되는데, 중심 모티브를 이루는 것은 ‘까막눈’이다. 여기에서 파생시킨 상황들이 특별히 기발한 것은 아니다. 벽의 낙서나, 버스 차장의 오라이 소리, 옛 가요 등은 과거를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아주 익숙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는 점이다. 황동규 시인이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이라고 했던가? <인어공주>는 이러한 사소함을 경배한다. 정성스레 다루어지는 사소함들은 푸른 하늘을 품은 바다, 해녀들의 물질 정경, 자전거의 딸랑대는 소리와 어우러지며 편안하고 안정된 고향 정서로 관객을 이끈다. 그리고 관객은 정겨운 웃음을 기대한다. 이미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별것 아닌 일에도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을 만큼 관객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은 놀랍지 않으면서도 놀라운 이 영화의 매혹일 것이다.

환상 아닌 환상의 구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판타지는 <반지의 제왕> 정도는 되어야 한다. <반지의 제왕>의 원작자인 J. R. R. 톨킨은 성공적인 환상이 이루어지려면 1차 세계(현실)와는 다른 2차 세계가 창조되어야 하고 모든 사건은 그 세계의 법칙 안에서 진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기능은 1차 세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인어공주>의 환상성은 미약하다. <인어공주>는 시간 구조상으로만 환상성을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어공주>에서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관객을 다소 놀라게 하고 머뭇거리게 만드는 것은 나영이 젊은 진국과 연순을 만나는 장면 정도이다. 그 이외의 전개는 대부분 현실적인 개연성의 원리를 따라 진행된다. 나영이 볼 수 없는 장면이 표출되는 것이 다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인어공주>는 시간 조작만으로 환상 아닌 환상을 구현한다. 이 영화는 나영이 과거로 가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엄마를 만난 것 때문에 환상적인 게 아니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잠시 뒤돌아보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문제는 나영이 과거로 감으로써 잊었던 시간을 현재로 불러들여 병치시킬 수 있었기에 환상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인어공주>는 과거를 가운데 두고 앞뒤로 현재가 배치된다. 앞에 제시된 현재에서 엄마는 그악스러운 때밀이 아줌마다. 엄마는 당당한 앞모습으로 다가오는 데 비해 아버지는 주로 뒷모습이 비쳐진다. 그는 축 처진 어깨로 시계추처럼 출퇴근하고, 말없이 담배만 피우는 인생의 패자다. 외삼촌은 악의는 없지만 이기적이고 말 많은 푼수다. 나영이 과거로 가서 연순, 진국, 영호를 대면하고 현재로 돌아올 때, 그들의 과거는 현재로 들어와 그들의 이미지에 겹쳐진다. 나영이 현재로 돌아오자마자 바닷가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젊은 시절 진국의 뒷모습을 보는 장면은 친절하게도 이를 잘 보여준다. 다른 인물의 이미지는 관객의 머릿속에서 오버랩된다. 이제 뒷부분에 나오는 현재의 엄마는 앞부분의 허접한 엄마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가 병치되면서 인물이 재발견되는 것이다.

박흥식 감독의 전작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도 주인공의 과거는 현재로 틈입한다. 원주는 버스의 창을 통해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나기도 하고 봉수와 함께 있으면서 자신을 무동 태우고 있는 아버지를 보기도 한다. 이를 통해 보습학원 강사로 살며 건너편 은행원이나 짝사랑하는 정원주는 새롭게 이해된다. 소박한 환상을 빌려 선조적 시간을 단순히 해체함으로써 당장 보이는 것을 다르게 보이게 하는 더 큰 환상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환상은 이를 통해 인물들이 행복을 찾는 데 있다.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손을 가진 김봉수와 정원주는 가까이에 있는 서로의 존재를 재발견하면서 화합으로 나간다. 여기에는 과거를 잊어야 화합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지난 세월을 인정하여 현재의 균열이 사소한 것임을 발견할 때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다.

착한 판타지의 힘

<인어공주>는 박진감이 넘치는 흥미로운 영화가 아니다. 흔히들 말하는 좋은 영화들처럼, 일상적 인식을 뒤집고 현재의 문제를 첨예화하며 고민을 심화시키는, 전복과 균열의 서사도 아니다. 어린 시절의 순수, 젊은 날의 정직함과 열정을 믿고, 서로의 시간을 대면할 수 있다면 현재의 균열이 치유될 수 있으리라 믿는 영화다. 소박한 환상을 통해 현실에서 해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심리적 불안이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영화다. 그래서 <인어공주>는 착한 영화다. 영화에서 나영이 “착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한다”라고 말하자, 연순이 “그래도 사람이 착해야죠”라고 강경하게 말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인어공주>가 선택한 뻔한 서사는 이러한 믿음에 기반한다. 박흥식 감독에게는 영화 자체가 이러한 환상의 매체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잠자리에 누워 주인공의 시련과 모험을 가슴 졸이며 듣다가, 주인공을 괴롭히던 요소가 제거되고 가족에게 돌아올 때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모든 것은 결국 잘된다는 낙관적 안식 속에서 잠이 든다. 이러한 경험은 성장 과정에서 내면화되며 세파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주고 무의식적 억압에 대응할 수 있는 자구책을 마련하는 힘이 된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낙관적 인식을 잃지 않게 하는 원천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뻔한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변용되면서,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또다시 그 딸들에 의해 아이들의 잠자리에 전래되고 어른들의 몽상 속에서도 노닌다. 그것이 말도 안 되는 환상일지라도, 때로는 현실을 도피하고 왜곡하는 것일지라도, 그것마저 없다면 이 힘든 세파를 어찌 견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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