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설경구, 영호에서 역도산까지 ‘천의 얼굴’은 괴로워
2004-07-16

배우가 배역을 맡으면 그 인물의 정서와 감정에 몰입해 살기 마련이지만 설경구는 유독 심하다. <박하사탕> 첫 장면에 영호가 달려오는 기차 앞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는 연기를 위해, 설경구는 위험천만하게 철교 위를 영호의 감정으로 비틀대며 다녔다. 이를 본 이창동 감독이 “쟤 일내겠다”며 스탭들을 보내 끌어내린 일화는 유명하다. <역도산>에서 설경구의 증세는 더 심해진 듯했다. 지난 6~7일 일본 히로시마의 <역도산> 촬영장을 찾았을 때 그는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설경구가 몸무게를 73㎏에서 94㎏으로 20㎏ 이상 불린 건 <공공의 적> 때 15㎏을 늘린 전력이 있는 만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 막상 그를 만나보니 세달만에 20㎏을 찌워 그 상태로 지난 4월부터 세달간 촬영하고, 크랭크업까지 두달 더 버틴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불어난 몸무게를 관절이 지탱하지 못해 수시로 허리와 무릎이 아프다고 했다. 촬영 직전 대학 동기인 김상진 감독과 술을 마시며 한시간 넘게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좀처럼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나지 않는 습관을 버리고 집에 와 누워야 했다. 실제로 촬영장에서 그는 틈나면 등받이 의자에 살찐 곰처럼 반쯤 누워 있었다.

심장에도 무리가 오는지 평소에도 씩씩거리며 숨쉰다고 했다. 한국에서 심장약을 지어왔고, 영화사 싸이더스에서 3억원짜리 보험을 들었다. “이게 내 몸이 아닌 거에요. 의사가 지금 상태에 적응하려고 하지 말래요.” 일본말로 찍는 <역도산>에서 그는 불과 세달 개인교습 받은 일본어 실력으로 긴 대사를 외웠다. 송해성 감독은 수시로 “대사 다 외웠냐”고 물었다. 다 외웠으면 길게 찍고 못 외웠으면 한 마디씩에 맞춰 컷을 짧게 끊어 찍을 요량이었다. 설경구는 여하튼 외웠고, 즉흥대사로 욕설을 마구 질러야할 때는 일본 배우에게 일본 욕 열가지를 적어달라고 해 그중 입에 붙는 것들을 내뱉었다.

가장 많이 달라진 건 얼굴이었다. <박하사탕> 때만 해도 잔잔하고 맑던 눈빛이 옆에 가기 꺼려질 정도로 매섭게 변해 있었다. 주변을 제압할 만큼 센 기를 내뿜는데 그게 뭔지 종잡기가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세속적 권세의 단맛과 쓴맛을 다 알고 세상을 믿지 않는, 그러면서도 세상과 거리를 두기보다 역도산처럼 자기 욕심을 위해 투지를 다지는 이의 눈 같다고 할까. 그는 한 인물을 연기하면 끝난 뒤에도 잔영이 자기 안에 남아서 변태가 돼가는 것 같다고 했다. <박하사탕>의 영호, <공공의 적>의 철중, <오아시스>의 종두가 한 인간 안에 섞였다면 변태가 안 되기도 힘들 터. 이번엔 영화에서 역도산이 하는 말을 인생의 모토로 삼은 듯했다. “한번 뿐인 인생, 착한 척하지 마라. 이 말 친지들에게 연하장 쓸 때 다 적어 넣을 거에요.” 그러면서 설경구의 얼굴은 특별한 연기가 없는 평상시의 표정으로도 드라마를 만드는 배우의 얼굴이 돼가고 있었다.

임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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