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게 있다면 화법 정도가 아닐까. “-_-ㅅ-_- 그놈은 이런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ㅠㅠ 설마 얘가 걔란 말인가? 쿠궁 ㅜㅜ 잘생겼다고 인정하긴 싫다.” “그놈은 나를 광견병 걸린 개 떼어내듯이 홱 팽개쳐냈다. 헉헉. 이게 뭐야. 이럴 수가…. 지은성은 더 놀란 듯 O_O 이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엉엉엉. ㅜㅜ 난 주그따.” 이모티콘과 한글 파괴, 솔직하고 과감하게 또래들과 교감하는 인터넷 세대들의 이야기에 충무로가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도 이미 여러 해. <엽기적인 그녀> <동갑내기 과외하기>에 이어 극장으로 간 세 번째 인터넷 소설 <그놈은 멋있었다>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러니까, 애초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화법’과 ‘감성’인 것이다.
한예원(정다빈)은 인터넷에서 자기네 학교를 비방한 지은성(송승헌)에게 항의 답글을 붙인 뒤에 테러 협박에 시달린다. 학교 앞까지 찾아온 지은성을 피해 담을 넘던 예원은 마침 담장 밑에 있던 그와 입술이 부딪치는 사고(!)를 친다. 은성은 기습 뽀뽀의 책임을 물어, 이때부터 예원을 ‘마누라’로 임명하고, 멋대로 찾아오기 시작한다. 그런 은성이 싫지 않은 예원은 그와 연인이 되지만,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은성을 짝사랑하는 퀸카가 있고, 예원을 짝사랑하는 킹카가 또 있다. 그리고 은성의 어두운 과거가 밝혀지면서, 이들의 연애는 자꾸 멈칫댄다.
영화판 <그놈은 멋있었다>는 예원과 은성의 알콩달콩한 로맨스를 중심으로 원작을 압축하고 변형했다. 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예원을 둘러싼 은성과 한성의 삼각관계, 은성을 둘러싼 예원과 혜빈의 삼각관계, 그리고 은성의 어두운 가족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정된 결합을 위해 달려간다. 부쩍 ‘싸가지’는 없어지고 주량은 늘어나는 십대들의 일상에서 이모티콘과 은어를 대체하는 것은 만화적 상상력과 MTV적 스타일이다. 즉흥적이고 소소한 재미들로 채워진 이 영화는 이즈음 막강한 관객층으로 떠오른 ‘로틴(low-teen)’에게 특히 어필할 만하다.
그러나 충동이든 운명이든 이들의 로맨스가 와닿지 않는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점이다. 첫눈 때문에 수능 시험장을 박차고 나가는 소녀의 무모한 순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문제는 에피소드 나열에 치중한 나머지, 인물의 감정과 사연을 차곡차곡 쌓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러브 스토리는 내내 장난스러워 보일 뿐, (수능 시험을 포기할 만큼)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차라리 감동적인 것은 눈밭에서의 로맨틱한 해후가 아니라, “나 너 존나게 좋아해” 같은 무뚝뚝한 고백이다(완결된 내러티브라기보다는 에피소드 모듬에 가까운 인터넷 소설이 과연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재론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그놈은 멋있었다>의 가장 큰 수확은 아무래도 정다빈의 ‘발견’이 아닐까 싶다. <옥탑방 고양이>에서 보여준 평범하지만 밝고 씩씩한 소녀상에 엽기발랄한 면모를 더한 정다빈의 연기는 김정은과 김선아의 뒤를 이을 코믹 히로인의 출현을 예감케 한다. 특히 ‘그놈’의 학교 울타리에 목이 끼는 수모를 당한 뒤에 노래방으로 직행해 감전이라도 된 듯 격렬한 엇박자의 율동과 함께 악을 쓰며 <짬뽕>을 부르는 장면은 ‘올해의 가장 웃기는 장면’으로 꼽힐 만하다. 순정멜로 이미지가 강했던 송승헌이 ‘나도 웃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도 신선한 변화. 단역 캐스팅도 흥미로운데, 일례로 ‘추행남’으로 출연한 <전원일기>의 응삼이 박윤배씨는 “키치적 느낌을 좋아한다”는 감독의 취향에 따라 캐스팅됐지만, 촬영 중에 ‘원조 얼짱’ 신드롬을 일으키는 묘한 우연을 낳았다.
:: 이환경 감독 인터뷰
“재미난 동창 녀석와 옛 얘기를 나누는 기분으로”
서울예대 출신의 이환경 감독은 이명세, 박종원 감독의 연출부를 거쳤다. <그놈은 멋있었다>는 이환경 감독의 연출 데뷔작으로, 귀여니의 원작 소설을 직접 각색한 것이다.시사회 반응이 크게 엇갈린다. 어떻게 느끼고 있나.
일반 시사에서 십대와 이십대 후반의 반응이 좋은 편이다. 십대들은 대리만족으로 재밌어하고, 이십대 후반은 지나간 추억으로 흐뭇하게 돌아보는 것 같다. 유치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건 이십대 초반이 많더라. 언론 시사에서는 예상했던 것과 다른 지점들을 지적받았다. 논란이 된다면, 고등학생들의 음주 문화나 욕설, 시험장을 뛰쳐나오는 것 같은 장면들일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부분은 넘어갔고, 모든 에피소드가 여고생의 신데렐라 판타지를 끌고 가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와 좀 당황스럽다. 시나리오의 결점을 커버하기 위한 나름의 설정을 두었는데, 그게 제대로 표현이 안 됐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설정을 말하는 것인지.
잘 나가는 놈과 어리버리한 여자애가 별 계기없이 커플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엔딩 타이틀에 넣은 유치원 생일파티 장면으로 이들의 ‘왠지 모를 끌림’에 역사가 있고 사연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원작에 어떤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나.
원래 다른 작품을 준비하다가, 판권을 구매한 영화사로부터 연출 제의를 받았다. 데뷔는 내 시나리오로 하겠다고 생각해왔고, 인터넷 소설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읽어보니 에피소드들이 재밌었다. 아이들 코드도 많이 녹아 있고, 무엇보다 원작자가 그 또래라는 게 좋아 보였다.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쓴 글이 아니라서 상투적인 느낌도 없었고.
배우들이 매력적이다. 특별히 주문한 게 있었나.
정다빈은 <옥탑방 고양이> 이미지가 이 영화에 맞겠다고들 해서 만났는데, 정말 딱이었다. 이 사람 아니면 안 되겠구나, 싶었을 정도다. 송승헌은 먼저 연락해서 시나리오를 보여달라고 했고, 꼭 하고 싶다고 기회를 달라고 의욕을 보였다. 실제로 송승헌은 기존 역할 이미지와 달리 악동에 가까웠다. 그래서 싸가지 없고 카리스마가 있는 원작의 지은성 캐릭터에, 송승헌의 엉뚱한 면들을 반영했고, 결과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이 영화를 어떻게 봐주길 바라나.
상업영화는 철저하게 상업적으로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만들었다. 고등학교 때 친했던 재미난 동창 녀석을, 비 오는 날 카페에서 만나 옛 얘기 나누는 기분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헤어질 때 또 보자, 연락할게, 라고 말하지만, 다시 안 보게 되지 않나. 그런 거다. 그렇게 잊혀져도 좋다. 보는 동안 재미난 추억을 떠올리는 기분에 젖는다면, 그걸로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