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니 원작의 영화(제목은 밝히지 않겠다) 시사회를 보고 나오면서 “저게 영화냐”며 흥분한 한 선배에게 말했다.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하지 마세요. 꼰대 소리 듣는다구요.”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 역시 꼰대였다. 두 영화를 보고 난 다음 견딜 수 없이 짜증이 밀려들었다. 그럼에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나의 의견을 개진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귀여니는 10대 문화의 엄청난 ‘권력자’다. 그가 발표한 소설 네 편의 책 판매부수가 350만부에 이르고 첫 소설 <그놈은 멋있었다>의 인터넷 조회수만 천만 회를 넘긴 데다 팬클럽 회원수가 백만 명에 육박하니 막강 파워가 아닐 수 없다. 섣불리 비판했다가는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쉰세대’라고 쏟아질 손가락질이 겁났다. 두 번째는 진심으로 ‘내가 쉰세대가 되버린 걸 아닐까’하는 의심에서 출발했다. 수백만 명의 10대가 환호하는 이야기라면 거기에는 그만큼의 공감대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야”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나는 눈 막고 귀 막은 ‘기성세대’임을 선언하며 소통의 창구를 닫는 꼴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 못할 ‘그들만의 사랑’어쩔수 없는 꼰대의 한계물론 춘향이와 이들의 선택에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이도령은 집안 좋고 전도양양한 ‘귀공자’ 인 반면 두 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은 모범생과는 거리가 먼 싸움짱들이다. 이들이 간택받는 과정은 조선시대 스타일일지언정 그 결과는 부모세대가 요구하는 바와 다르다. ‘남녀평등’을 외치는 언니들의 기대도 깨지만 ‘사’자 좋아하는 부모의 기대 역시 깬다. 그러나 이들의 선택을 일종의 ‘간접저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지은성이 미국이라는 빠져나갈 피난처가 없거나, 반해원이 홧김에 달릴 스포츠카가 없었더라면 과연 이 커플들은 어떻게 됐을까. 두 남자에게 어른들의 질서로부터 애인을 구원할 에너지가 존재할까. 그렇지도 않아보여서 더 씁쓸했다고 말하면 나는 역시 꼰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