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순수로부터 타락으로의 여정, <아임 낫 스케어드>
2004-08-03
글 : 김용언
1970년대 이탈리아 남부, 두 소년 사이에서 벌어지는 ‘실락원의 풍경’

자전거를 타고 황금빛 들녘을 누비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풍경이 펼쳐진다고 해서 전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예전 영화들과 똑같이 진행되는 건 아니다. 아이들의 삶이 그토록 풍요로운 순진함과 행복으로만 충만한 것도 아니다. 아이들의 삶이라고 해서 언제나 용서받고 감싸지고 그들의 순수함이 보존되어야 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만은 없다. <지중해>와 <너바나>로 잘 알려진 가브리엘 살바토레의 신작 <아임 낫 스케어드>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아름다움의 견고함을 확신하고 있던 10살짜리 소년이 순수함을 상실하기까지, 그 직전의 풍경을 가슴 아프게 그려보인다. 순수로부터 타락으로의 여정, 성장한다는 것의 쓰라림 혹은 꿈과 환상이 현실로 드러났을 때의 충격과 경악.

1970년대 남부 이탈리아의 조그만 시골 마을, 귀여운 여동생과 아름다운 어머니, 터프한 트럭 운전사 아버지와 함께 사는 소년 미카엘은 어느 날 버려진 집의 지하 굴에 갇힌 이상한 존재를 발견한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비명 같고 신음 같은 소리만 내는 또래 소년이 쇠사슬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버려진 집 안에는 냄비와 물바구니가 나뒹굴고 있다. 마치 누군가가 이곳에 일부러 갖다놓은 듯…. 물과 먹을 것을 청하는 소년에게 부지런히 그것들을 날라다준 미카엘는 소년과 점점 친해진다. 그러나 그는 차츰 예전엔 알지 못했던 이상한 일을 깨닫는다. 미카엘의 집에는 버려진 집에 있던 냄비과 똑같은 것이 있었고, 아버지의 친구라는 무서운 세르지오 아저씨가 들이닥쳐서는 밤마다 텔레비전을 보며 격한 말싸움을 벌인다. 마침내 미카엘은 아버지와 세르지오, 마을 사람들이 열심히 보던 뉴스 프로그램을 통해 두달 동안 실종된 부잣집 소년 필리포 유괴사건을 보게 되고, 자신이 발견한 소년이 필리포임을 알게 된다.

<아임 낫 스케어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모두가 잠든 밤중, 미카엘이 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램프를 밝힌 채 중얼중얼거리며 필리포에 대한 음험하고 신비로운 상상을 발전시키는 장면, 그리고 미카엘의 여동생이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개를 바라보며 빵을 오물오물 씹어삼키는 장면일 것이다. 상상력과 글쓰기,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런 세계를 창조한다는 행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매혹. 이 영화는 빅토르 에리스의 <벌집의 정령>이나 에마뉘엘 카레르의 소설 <스키 캠프에서 생긴 일>의 먼 친척뻘이다. 그것은 아직 바깥 세상의 비천함과 황량함을 깨닫지 못한 채 가족과 친구의 사랑을 받으며 편안한 울타리 안에서 언제까지고 안전할 것이라 믿는 어린 시절만의 특권일 것이다. 그에게 유괴와 살인과 납치는 자신이 지어내는 모험 소설의 일부일 뿐 자신이 믿는 세계의 견고함은 그대로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견고함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또한 갑작스럽게 극적인 사건의 발생으로 인해 파괴되는 것도 아니다. 위험과 추함은 애초에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피흘리며 거꾸로 매달린 닭, 탐욕스럽게 섹스하는 돼지들…. 지옥은 다른 어떤 곳이 아닌 바로 여기이다. 그것은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성장하면서 깨달아야만 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의 숨겨진 의미를 하나씩 발견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어른이 된다는 것에 딸려 있는 무시무시한 담보물인 것이다.

미카엘이 무서운 진실을 깨닫는 순간, 자신도 필리포의 불행에 공범일 수밖에 없다는 것, 범죄의 씨앗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배태될 수 있음을 깨달은 순간, 그리고 아버지의 총에 맞은 순간은 그런 발견의 행위가 가져다주는 무시무시한 충격 그 자체다. 그건 마치 미카엘의 친구가 들려주는 ‘아버지 때문에 죽은 소년’의 괴담이라든가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게 보이지 않으세요?”라고 차갑게 질문했던 죽은 아들의 그것과 겹쳐진다. 아버지 피노와 미카엘 사이의 보이지 않고 느끼지 못했던 긴장 관계는 아들을 향해 총을 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제까지 팔씨름으로 서로의 남성성을 장난처럼 겨뤄보던 부자의 관계는 이제 더이상 예전같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피노가 미카엘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또 다른 아이를 납치하여 이용했다는 것에서 그 날카로운 상처의 기억은 미카엘과 피노 사이에서 평생에 걸친 강박증으로 남지 않을까. 영화의 대단원은 그 순간 외형적으로 보이는 스릴러의 틀거리보다는 윤리에 관한 작은 우화가 되어간다(이 부분은 다르덴 형제의 엄격한 윤리극 <약속>과 비교해 이야기하더라도 흥미로울 듯하다).

하지만 고통을 판타지로 승화시켰던 <지중해>에서도 드러났듯이, 아픈 현실을 외면하지는 않지만 그것으로부터 어떻게든 아름다움의 요소를 찾아내려 하는 도저한 낭만주의의 시선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는 가브리엘 살바토레의 특성은 영화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하여 영화의 지나친 로맨티시즘은 때때로 거슬리기도 한다. 영화 전반에 걸쳐 과잉이라 할 만큼, 마치 히사이시 조의 음악을 연상케 하는 현악기의 선율이 그런 특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주인공 미카엘의 시점으로 줄곧 영화가 진행되는 터라 아직까지 어른들의 비열하고 차가운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시선으로는 절대적인 괴물도 혹은 악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절박한 고통을 그려내기에 ‘좀더 대중적으로는’ 당연한 방식일 수 있으나 또한 현실 앞에서 주저하고 도피하고 마는 안전한 선택지였다는 비판도 피해갈 순 없을 듯하다.

:: 미카엘과 필리포 역의 두 소년

그놈들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아임 낫 스케어드>의 가장 큰 주역은 단연 영화의 전체를 끌고 나가야 하는 두 소년, 미카엘과 필리포 역을 맡은 어린 배우이다. 자신 앞에 시시각각 던져지는 윤리적 선택의 상황 앞에서 갈등하던 미카엘, 이미 세상을 다 알아버린 것 같은 눈빛으로 “난 죽은 거야!”라고 외치는 필리포를 떠올려보라. 가브리엘 살바토레는 주인공을 찾기 위해 오디션을 개최, 600여명의 아이들 중 주세페 크리스티아노와 마티아 디 피에로를 선발했다. 그들은 실제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남부의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었다. “그들의 언어, 제스처, 시선을 볼 때 그들은 발견과 공포, 불복, 결속을 그린 이 대서사시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은 잊혀진 남부에서 태어나 영웅들이 난무하는 세상에 속한 우리의 관심 밖에서 살아왔다. 아이들은 촬영 중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제가 카우보이였고 당신이 인디언이었던 것처럼 해봐요.’ 여기서 과거시제를 쓴 건 그들의 실수가 아니다. 그런 식으로 말함으로써 자신의 행위가 연기라는 걸 부인하며 모르는 어떤 것을 연기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즉 난 이미 카우보이였던 것이며 난 그저 그것을 끄집어내는 것일 뿐이란 것이다… 아이들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고통과 이탈 같은 어려운 문제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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