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포터> 시리즈는 어떻게 영화로도 성공했는가?
제멋대로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에 동그란 안경을 쓴 소년 해리의 이야기를 베스트셀러라고만 이야기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저 많이 팔린 게 아니라, 아주 대단히 많이 팔렸기 때문이 아니다. 해리 포터는 토란국이나 생굴이나 토하젓보다도 책을 더 싫어하던 아이들의 마음을 바꿔놓았다. 종이책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고 말하던 사람들의 입을 닥치게 만들었다.
<해리 포터>는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하지만 지금껏 나온 다른 판타지들을 모두 합친 것만큼의 성공을 거두는 게 당연할 만큼 재미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해리 포터>의 성공비결이 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이 기적의 책이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을 리가 없다. 책을 읽은 사람들만 모두 몰려와도 흥행은 보장된다. 하지만 베스트셀러를 영화로 만드는 것은 반드시 달콤하지만은 않다. 그 유리함 못지않게 시고 떫은 맛도 있다.
베스트셀러를 영화로 만든다는 악몽
이야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쾌락의 원천 중 하나다. 문자는 물론 언어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인간은 이야기를 즐겨왔다. 영화도 소설도 모두 이야기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은 다르다. 소설이 던져주는 것은 파편화된 단서들뿐이다. 이를 그러모아 적당히 이어붙여 구체적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읽는 이의 회색의 뇌세포에게 맡겨져 있다. 반면 영화는 이미 형상화된 이미지들을 쏘아날린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많은 실패작들의 죄악은 종종 이 차이를 망각한 데에서 비롯된다. 책과 같은 색깔, 똑같은 속도와 밀도로 이야기를 펼쳐놓아 밋밋한 진행으로 관객의 눈꺼풀을 무겁게 만드는 것이다. 아니면 반대로 지나치게 의식하는 경우가 있다. 소설의 내러티브를 깡그리 무시하고 무조건 액션 신파 활극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재수가 좋다면 원작과 관계없는 재미있는 영화가 나온다. 하지만 이도 저도 아니고 울화만 돋우는 물건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해리 포터>처럼 열렬한 지지자들을 대규모로 거느리고 있는 책이라면 상황이 더 나쁘다. 2002년 (어린이가 아닌) 미국 성인 다섯명 중 한명이 <해리 포터>를 읽었다고 한다. 잠재적 관객은 곧 잠재적 비판가다. 그중에는 시리어스 블랙과 루핀 교수의 키 차이가 적당하지 않아서 ‘오래된 부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기상천외한 것도 있다. 전부 비위를 맞추려 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볼드모트의 저주를 받는 편이 나을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해리 포터>는 판타지다. 장르 소설은 일반적으로 초대형 베스트셀러는 되지 못한다. 이미 사회화가 완료된 성인에게 용이나 마법 이야기 따위는 호사가의 불량식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반지의 제왕>이 이토록 큰 승리를 쟁취하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실 지금까지의 판타지영화들은 팬덤에서도 항상 좋은 점수를 받지는 못했다. 고작 나무틀에 종이를 발라 만든 바위나 고무로 만든 용은 판타지 팬들의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혔다.
하지만 과학기술 혁명은 판타지 팬들에게 기적을 가져왔다. 이제 꿈이 현실에서 생명을 얻는다. <반지의 제왕>의 성공 이후 판타지영화의 미래를 가로막을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빛이 눈부시면 오히려 그림자는 더 짙은 법이다. 판타지영화는 이미지의 향연만으로 충분하다고 방심하다보면 내러티브가 간데없다. 영화는 여전히 굉장하지만 재미는 없다. 판타지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것은 그냥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안전하지만 만만치 않은, 훌륭하지만 불완전한
안전한 길은 쉬운 길은 아니었다. 판타지 장르에서는 전통적으로 인물 묘사가 중요하다. 아침 햇살 같은 눈부신 머리카락이라든가 겨울밤 유성 같은 보랏빛 눈동자, 인고의 세월을 보여주는 찌푸린 이마 같은 것에 대해 아무리 긴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조앤 K. 롤링은 놀라울 정도로 말을 아낀다. 헤르미온느의 첫 등장에서 묘사되는 것은 부스스한 갈색 머리카락과 커다란 앞니 정도다. 독자는 그 아이의 눈동자 색깔조차도 알 수 없다. 맥고나걸 교수를 처음 만날 때 설명되는 거라고는 초록색 망토를 입고 있으며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새카맣고 엄격한 얼굴이라는 것뿐이다. 그녀가 머리를 높이 틀어올렸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4권을 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하지만 <반지의 제왕>과는 달리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아트워크들마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선택한 키워드는 빅토리아 시대다. 배경은 현대지만 마법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빅토리아 시대풍으로 디자인됐다. 호그와트의 실내장식이나 망토 밑에 받쳐 입은 마법사들의 의상들은 모두 19세기를 암시한다. 다이애건 앨리의 거리와 상점들에서는 틈틈이 <올리버 트위스트>를 찍어도 괜찮을 것 같다. 영국 역사상 가장 눈부셨던,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진보와 계몽이란 개념에 매혹되어 있던 시대를 선택한 것은 물론 우연이 아니다. 예외가 있다면 교복이다. 학생들은 망토 밑에 전형적인 영국 사립기숙학교풍 교복을 입는다. 이는 두말할 것 없이, 기숙학교물 전통에 대한 동경을 북돋우기 위해서다.
<마법사의 돌>의 분투는 충분히 보답받았다.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물론 이미 외울 지경인 사람들에게조차 해리는 대니얼 래드클리프, 헤르미온느는 에마 왓슨, 론은 루퍼트 그린트다. 원작에서 해리는 좀더 깡마르고 왜소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어느 사이 잊혀졌다. 급속히 성장 중인 대니얼의 탄탄한 체격은 원작과의 위화감으로 영화로의 몰입을 방해하는 대신 멋지게 커준 것에 대한 탄성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영화 <해리 포터>의 인물 형상화는 유례없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영화야 어떻게 만들건 해리와 론과 헤르미온느가 나오는 한 반드시 영화를 보겠다는 결의를 밝히는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쩌면 지금 6권을 집필 중인 롤링의 머리 속에서도 해리는 대니얼의 얼굴로만 그려질지도 모른다.
2편인 <비밀의 방> 역시 같은 전략, 같은 스타일을 고수한다. 만일 전편과 다르다고 느낀다면 이는 책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주요 인물들을 한꺼번에 등장시키면서 마법 세계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까지 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빴던 1편과는 달리 <비밀의 방>은 미스터리스릴러 구조에 집중한다. 영화 역시 좀더 꽉 조여진 내러티브를 가질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이 변하지 않아 클라이맥스에서는 오히려 김이 샜던 1편에 비하자면야 대단히 극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크리스 콜럼버스의 안전한 선택은 동시에 훌륭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영화
하지만 새로이 감독을 맡은 알폰소 쿠아론은 결단을 내린다. <아즈카반의 죄수>의 혁명은 세 아이들이 부쩍 커버렸다는 데 있지 않다. 이제 호그와트 학생들은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는 대신 느슨하게 풀어헤친다. 해리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책에서보다 훨씬 극적으로, 그리고 폭력적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그리고 숨가쁘게 이어지는 것이 구조 버스 레이싱이다. ‘하나같이 밝은 표정의’ 마법사들이 아니라 낡은 담요로 몸을 감싼, 어딜 보나 노숙자로만 보이는 마법사들이 가득한 버스에는 부두교풍의 말하는 사람 머리까지 매달려 있다. 책에서는 그저 조금 특이한 이동 수단에 지나지 않던 버스는 영화 <스피드>에 아주 약간밖에 떨어지지 않는 박진감 있는 레이스를 펼치며 보는 이의 혼을 쏙 빼놓는다. 간신히 도착한 주점 리키 콜드런은 분명 전편들에서도 나온 장소인데 처음 보는 것 같다. 훨씬 기괴하고 음침하며 일그러져 있다. 호그와트도 낯설다. 어두운 하늘에 떠 있는 디멘터들이 아니라도 학교의 벽과 복도와 계단, 그리고 시계탑은 충분히 위험해 보인다. 이전의 호그와트가 그 많은 유령들에도 불구하고 익살스럽고 즐거운 곳이었다면 이번 호그와트는 흉가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는 어둡고 불길하다. 때로는 위협하고 때로는 달래며 자기 갈 길을 간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이라면 쿠아론의 도발은 불쾌할지도 모른다. 해리가 만들어내는 페트로누스가 어째서 수사슴 모양인지, 비밀지도를 만든 네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비롯해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들이 영화에서 누락되었다. 굳이 팬이 아니더라도, 영화가 책을 능가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해리가 히포그라프를 타고 나는 모습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인 것에서 증명되었듯이, <아즈카반의 죄수>는 원작과는 다른, 하지만 여전히 매혹적인 영화다. 신비롭고 흥미로운 볼거리들은 여전히 움켜쥐고 있는 동시에, 새롭게 해석한 내러티브가 독자적 호흡으로 전개된다. <아즈카반의 죄수>는 <마법사의 돌>이나 <비밀의 방>의 미덕은 계승하면서도 악덕으로부터는 벗어났다.
4편 <불의 잔>은 두배로 늘어난 양뿐 아니라 질에서도 많이 달라졌다. 인종문제와 계급문제 등 어두운 면이 전면으로 부각되며, 죽는 사람이 거의 나오지 않았던 전작들과는 달리 아동용치고는 제법 폭력적이다. 지금껏 나온 시리즈 중 가장 재미있는 동시에 뛰어나다는 평판을 받고 있는 <불의 잔>이 이번에는 어떻게 재해석될 것인지 지루하지 않은 기다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