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코프]
왕가위 ‘연속극’의 마지막 챕터, 해외신작 <2046>
2004-08-23
글 : 김도훈

1967년의 홍콩. 삼류 포르노 소설을 써서 벌어먹고 사는 주선생(양조위)은 오리엔탈 호텔 2407호에 머무르고 있다. 그는 미래에 대한 소설을 하나 쓰고 있는데,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안드로이드와 사랑을 나누고, 하루에 한번 기억을 되찾아준다는 장소 ‘2046’으로 떠나는 기차가 정기적으로 운행한다. 말주변 좋고 능글맞은 주선생은 많은 여자들을 만나왔다. 4년 전 싱가포르에서는 도박사 수리첸(공리)을 만났고, 머물고 있는 호텔의 주인집 딸인 왕징웬(왕정문)의 비밀스런 로맨스에 동조자가 된다. 그리고 그는 2046호에 머무는 젊고 아름다운 고급창녀 바이링(장쯔이)을 악연처럼 만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왕가위의 8번째 장편영화 <2046>은 줄거리를 소개하는 것이 부질없는 영화다. 내러티브는 어느 순간 이미지 속으로 슬금슬금 사라져 들어가고, 그런 이미지들은 인물들을 섬세하게 연결하는 태피스트리처럼 얽히고 설킨다. 언뜻<2046>은 <화양연화>의 후속편처럼 보이는 데자뷰 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장쯔이는 <화양연화>에서 장만옥이 머물던 2046호에 살고 있으며, 양조위는 조금 더 세파에 물들어 능글능글해진 버전의 주선생을 연기한다. 그런가 하면 공리가 연기하는 도박사 ‘수리첸’은 <화양연화>에서 장만옥이 연기했던 캐릭터와 이름이 같다. 비평가 토니 레인즈의 농담처럼 “4년에 한번씩 나오는 연속극”인 셈이다.

하지만 아마도 이 ‘연속극’은 이번으로 그 마지막 장을 닫을 예정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2046>은 7편의 전작들에 비로소 작별을 고하는 듯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게 꼭 후속편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4년 동안 작업하면서 애초에 생각했던 캐릭터들은 완전히 다른 성격으로 변모했다. 사실 이 영화는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의 초상이다.” <2046>은 이같은 왕가위의 말처럼 ‘(왕가위 영화의) 과거로부터 벗어나려는’ 영화처럼 보인다. 전작들에서 조금씩 가져와 직조한 듯한 미장센들이 곳곳에 숨어서 관객에게 작별인사를 고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프로덕션 과정에 지친 일본 배우 기무라 다쿠야가 “혹시 이 영화 2046년에나 완성되는 거 아닌가요?”라고 감독에게 물어보았다는, 마지막까지 시간을 맞추지 못해 시사일정을 하루나 연기하며 칸영화제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토록 조바심나게 사람들을 기다리게 만들었던 왕가위의 8번째 퍼즐 <2046>. 10월22일이 되면 냇 킹 콜의 <The Christmas Song>에 실려 황홀하게 펼쳐지는 이미지들의 조각들을 마침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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