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비평 릴레이] <알 포인트>, 정성일 영화평론가
2004-08-24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손에 피 묻힌자 살아 못 돌아가리” 정글속 죽은자들의 메시지 속뜻은

오래된 이야기. 네 사람이 길을 잃었다. 해는 지고, 길을 잃고 헤매다가 텅 빈 교실을 발견했다. 여기서 밤을 새우기로 하고 짐을 풀었는데, 너무 무서워서 한 사람씩 교실 모퉁이에 서서 상대방이 등을 치면 달려가서 앞사람 등을 치는 놀이를 밤새 하기로 했다. 그들은 밤새 그 놀이를 하면서 두려움을 달랬다. 그리고 아침이 와서 교실을 떠났다. 그런데 불현듯 깨달았다. 그 놀이는 네 사람이 할 수 없는 놀이였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더 많은 그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공수창이 시나리오를 쓰고 처음 연출을 한 〈알 포인트〉의 우리 곁의 무시무시한 두려움이다. ‘줄리엣이 은밀히 로미오(Romeo)를 찾으러 간다’는 실종자 구조 군사작전 약자를 뜻하는 알(R) 포인트 지역은 좌표 63도 32분, 53도 27분, 호치민시 서남부에서 150킬로미터 떨어진 캄보디아 접경의 옛 프랑스 휴양지다. 여기에 파견된 18명의 한국군이 실종되고, 끊임없이 부대로 구조요청 무선이 날아온다. 1972년 1월30일 일요일, 최태인 중위(감우성)를 지휘관으로 열 명, 혹은 아홉 명의 수색소대를 파견한다. 여기는 밤에는 어둠뿐이며, 낮에는 안개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이다. 이 영화는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의 이야기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의 오랜 원본은 조지프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이고, 영화에서의 가장 야심적인 버전은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이다. 어쩌면 최 중위와 그의 소대가 머무는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프랑스 휴양지는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에서 복원된 대목에서 빌려온 아이디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수창은 같은 이야기를 갖고 정반대의 목적지에 다다른다. 콘래드(와 코폴라)는 과잉이 되어버린 제국주의와 대면하지만, 공수창은 블랙홀을 만난다. 거기에는 사실상 아무도 없다. 텅 빈 장소, 그러나 거기에 와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객관적인 제로와 술래잡기가 시작되면서 거기서 마주치는 것은 전쟁의 현실로부터 역사의 실재에로의 추락이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매장할 수 없는 죽은 자들의 귀환과 마주하고, 궁극적으로 그들 자신도 그 일부가 된다.

그 필연성, 그것은 프랑스 군대의 기나긴 지배, 그 뒤를 이어 상륙한 미군의 침략, 그리고 그들과 함께 도착한 한국군의 군화 아래의 시간을 압축한 듯한 이 기괴한 폐허의 휴양지가 그들의 목적지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뒤집힌 데자뷔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찾아야 하는 미션은 그들 자신의 주검이다. 혹은 그들이 죽을 때 그들의 미션은 완수된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이라는 현실의 구멍이 되기 때문에 그들을 메우기 위하여 새로운 부대의 도착을 기다려야 한다. 전쟁과 역사는 그렇게 술래잡기를 계속 할 것이다.

미안하게도 이 모든 것이 물론 뻔하다. 시나리오작가 출신이라고 믿을 수 없게 단조로운 인물 구성과 느슨한 이야기는 종종 지지부진하고, 역사를 압축한 옛 휴양지는 큐브릭의 〈샤이닝〉을 떠오르게 만든다. 실내에서 벌어지는 죽고 죽이는 자멸극은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에서 이미 본 것이며, 정글은 종종 식물원을 거니는 것 같다. 하지만 공수창은 겁이나 주고 비명을 지르려고 이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다. 소녀들이 비명 경쟁을 벌이고, 소리만 시끄럽고, 하여튼 과거로부터 꾸역꾸역 기어 나와서 말이 안 되는 트라우마를 하소연하는 올해 여름 한국영화의 새로운 장르인 (〈링〉의) ‘사다코 자매들’ 연작이라고 불릴 만한 한심한 목록 안에서 〈알 포인트〉는 거의 유일하게 동시대의 두려움과 마주하려는 용기를 지닌 영화다. 알 포인트 입구에 써 있는 글귀, 손에 피 묻힌 자,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 그건 지금 우리에게 간절하게 보내는 메시지다. 정글에서 역사를 보았다면 사막에서는 실재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의 죽은 자들이 시간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보내는 통신이다. 그리고 그 죽어 가면서 도움을 청하는 비명소리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까닭이다. 코러스. 손에 피 묻힌 자,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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