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섹스와 폭력으로 가득 찬 냉장고, <프리즈 미>
2004-08-24
글 : 김수경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현대판 유디트 이야기, 섹스와 폭력을 빼면 냉장고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클림트와 카라바조의 그림으로 유명해진 유디트라는 여인이 있다. 구약성서 외경에는 이스라엘의 과부였던 그녀가 침략자인 신바빌론의 홀로페르네스 장군을 유혹하여 목을 벤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르네상스 이후 수많은 화가들이 ‘영웅’ 유디트를 화폭에 담았다. 그중에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라는 바로크 시대의 여류화가도 있다. 천재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친구에게 강간을 당하고 원치 않은 결혼을 하는 등 그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유디트는 ‘영웅’보다는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살아 있는 여성’의 이미지가 강하다. ‘나쁜 남자’에 대한 복수와 증오가 선연히 드러난다. <프리즈미>는 아르테미시아의 불행했던 삶과 유디트의 이야기를 겹쳐놓은 듯한 복수극이다.

눈오는 밤 불량배들에게 여주인공 치히로는 윤간을 당한다. 그녀가 고향을 떠나 도쿄로 와서 직장생활을 한 지도 5년이 흘렀다. 남자친구인 노가미와 결혼을 앞둔 치히로. 출근을 서두르던 아침, 5년 전 그녀에게 악몽을 선사했던 강간범 히로가와가 그녀를 찾아온다. 그는 말한다. 나머지 일당인 고지마와 바바도 곧 도착할 것이라고. 이후 스토리는 한때 비디오 대여점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B급 성인영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와 유사하게 흘러간다. 5년 전 악몽을 선사한 악당들을 치히로가 차례로 해치워간다. 달라진 조건은 <프리즈미>의 경우 친절하게도 악당들이 가정방문을 온다는 점이다. 유디트처럼 치히로는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적들의 목을 벤다.

<프리즈미>는 공포영화의 장르성보다는 콤팩트하게 만들어진 V시네마(비디오시네마)를 연상시킨다. 냉장고에 시체를 얼리거나 그로 인해 네크로필리아로 빠져드는 설정은 적은 예산으로 강력하고 인상적인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V시네마의 기본 전략과 일치한다. 공간과 캐릭터의 최소화, 복수에 집중하는 내러티브, 선명하게 구분되는 대립구도가 지속된다. 불필요한 정사신과 샤워장면으로 남성관객의 눈요기로만 그려지는 여주인공 치히로, 차례대로 피범벅이 되어 죽어가는 남성캐릭터는 ‘폭력과 섹스에 의한 즐거움’을 지상과제로 삼는 V시네마의 전형성에 그대로 맞아들어간다. 야쿠자영화 <고닌>과 <검은 천사>로 널리 알려진 이시이 다카시의 연출도 일관되게 ‘타임킬링’에 집중한다. 그러한 값싸고 강력한 장치는 대부분 진부한 섹스와 폭력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연일 쏟아지는 뉴스만으로도 ‘엽기’는 충분하다. 좀더 정교한 장르영화가 그리운 늦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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