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현실과 환상의 실험은 계속된다, 곤 사토시
2004-08-25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이혜정

곤 사토시가 제8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을 찾아왔다. 1997년 첫 번째 애니메이션 <퍼펙트 블루>를 만든 그는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마블링처럼 기묘한 무늬를 이루는 이 영화로 성숙하고 사실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퍼펙트 블루>는 아이돌 가수 미마가 배우로 전업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위협에 시달리는 스릴러다. 그녀와 똑 닮은 가짜 미마가 인터넷에 사생활을 공개하지만, 또 다른 미마는 가짜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은밀한 마음까지 알고 있다. 곤 사토시는 애니메이션에선 보기 드문 스릴러 형식을 가져와 내가 누구인지, 너는 누구인지, 치명적인 부분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만들었다. <뱀파이어 헌터D> 시리즈를 제작했고 <퍼펙트 블루> 프로듀서이기도 한 마루야마 마사오는 “<퍼펙트 블루>는 어른스러운 첫 번째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저예산 시스템과 적은 수의 스탭으로 작업하는 곤 사토시는 2001년엔 <천년여우>를, 2003년엔 <도쿄 갓파더즈>를 만들었다. 두 영화 모두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새로운 줄기를 만들고,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여질 만한 여지를 열어두는 애니메이션이었다. <천년여우>는 갑자기 은막에서 사라진 전설적인 여배우 치요코가 첫사랑을 찾아 헤매온 과거를 들려주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다. 치요코는 군국주의에 반대하다 쫓기는 신세가 된 첫사랑을 찾아 만주로 가고, 그 고향 홋카이도의 눈밭을 헤치고, 마침내 천년의 세월을 관통한다. 치요코가 출연한 영화와 그녀의 여정이 뒤얽히는 이 영화는 시간과 추억의 의미를 실험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곤 사토시가 이번 영화제에 들고온 신작은 지난해 연출한 <도쿄 갓파더즈>. 존 포드의 낙천적인 서부영화에서 영감을 얻은 이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실사에 가까운 비율의 캐릭터, 현실을 비집고 들어오는 과거의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다소 디즈니 영화 같다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코엑스 건물 밖으로 달려나가 줄담배를 피우던 곤 사토시는 한국 애니메이션은 한국영화와 달리 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지 매우 궁금해했다.

당신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당신에게 시간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사람들은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일방적으로 진행된다고 믿는다. 시간이 뒤섞이면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즐거울 때는 시간이 빨리 가고, 괴로울 때는 천천히 가지 않나. 시간은 매순간 모두에게 다르게 느껴진다. 또한 시간은 과거로 거슬러올라가기도 하고 미래로 뛰어넘기도 한다. 나는 지금 아주 오래전 일어났던 일이나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일을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처럼 과거와 현재, 미래는 한순간 안에 긴장을 형성하면서 공존한다. 추억이 그렇다. <천년여우> <도쿄 갓파더즈>에서처럼, 추억은 나를 과거로 데려다주는 열쇠다.

<퍼펙트 블루> <천년여우>는 시간뿐만 아니라 현실과 환상까지도 뒤섞어놓는다. 당신은 ‘트롱프 뢰유 스타일’이라는 말로 그런 시도를 설명한 적이 있다.

‘트롱프 뢰유’(trompe l’oeil)는 사람을 속이는, 꼭 진짜처럼 보이는 그림을 뜻하는 프랑스 단어다. 건물 벽에 창문을 그리고, 그 창문을 통해 정말 보이는 것처럼 풍경을 그려넣는 식이다. 나는 트롱프 뢰유를 의도하진 않았지만 누군가 <퍼펙트 블루>를 보고 그런 말을 했고, <천년여우>도 비슷한 방식을 취하게 됐다. 현실은 꿈이기도 하고 꿈은 현실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대화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일본에 있는 내 작업실과 아내, 작업 중인 영화도 생각하고 있다. 나는 당신과 대화를 공유하면서, 아내와는 또 다른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 인간이란 그렇게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현실과 환상을 함께 사용하는 실험을 하고 싶었다. <퍼펙트 블루>를 보는 관객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미마가 느끼는 혼란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관객은 당신의 영화, 특히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곤 한다.

관객이 모든 걸 이해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100명이 보았다면 100명이 모두 다른 느낌을 갖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원작자인 내가 어떤 해석이 가장 좋은 거다, 라고 말하면 시험의 정답 같지 않나. 치요코가 우주선을 타고 떠나는 <천년여우>의 마지막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내 느낌을 말해보자면, 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성장을 하고 이상도 높아진다. 그런데 이상이 높아지면서 좇아가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나는 그걸 비관하지 않는다. 이상을 좇는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천년여우> 마지막에 관한 내 느낌은 그런 것이다.

당신이 만든 세편의 애니메이션은 실사영화로 만들더라도 무리가 없을 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굳이 애니메이션을 고집하는 까닭은.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한다. 일본어밖에 못하는 것처럼, 내가 할 줄 아는 건 그림뿐이다.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실사는 그림과 사진처럼 서로 다르다. 사람들은 내 그림이 사실적이라고 말하지만, 그림은 아무리 실제와 가깝다고 해도 그리는 사람의 의도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카메라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 사물을 고정시킨다. 작가가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매체는 그림이다. 비디오카메라 작동 설명서를 사진이 아니라 그림으로 구성하는 건 그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도쿄 갓파더즈>는 유독 현실에 가깝다. 홈리스가 주인공이고, 초라한 도쿄 뒷골목도 사진으로 찍은 실제 공간을 바탕으로 그렸다.

일본에는 “인생의 뒷길”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홈리스들이 실제로는 인생의 뒷길이 아닐 거라고 생각해서 그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뒷골목 풍경이 다소 밝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홈리스들은 행복하지도 밝지도 않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애니메이션 속에서 상처를 치유하면 관객도 힘을 얻을 것 같았다. <도쿄 갓파더즈>의 가장 큰 목표는 이 영화를 본 관객이 좀더 밝아지고 기운을 내는 것이었다.

당신은 만화를 그리기 시작해 애니메이션 감독이 됐다. 처음부터 애니메이션을 염두에 두고 있었나.

난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걸 즐기다보니 기회가 생겼다. 작가로 처음 애니메이션을 시작했는데, 내가 원했다기보다 각본 쓰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쓰다보니 재미가 붙어서 계속 썼고, 지금도 각본 쓰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만화를 그린 경험은 내게 많은 도움이 됐다. 만화는 흑백이고 소리도 없지만 작화나 캐릭터디자인, 스토리 구성 등 모든 일을 혼자 하기 때문이다. 나는 애니메이션의 전문 분야를 모두 알고 있고, 그건 내 의도를 좀더 쉽게 관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퍼펙트 블루> <천년여우>는 모두 여배우가 주인공이다. <천년여우>는 영화 안에 수많은 영화를 삽입하기도 했다.

<퍼펙트 블루>의 미마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여배우라는 직업은 현실과 환상을 뒤섞기에 좋은 소재가 되었다. <천년여우>도 비슷하다. 이 영화의 컨셉은 치요코가 마치 천년 동안 살았고, 천년 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쫓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선 누구나 아는 이미지를 사용해야 했는데, 치요코가 여배우라면 수백년 전 과거의 장면을 영화에서 가져와 삽입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천년여우>에 나오는 물레 돌리는 노파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미집의 성>에 나온다.

일본영화보다 미국영화를 더 많이 보았고, 영향도 더 많이 받았다고 했다. 영향을 받은 감독들은 누구인가.

애니메이션보다는 실사영화에서 영감을 얻는 편이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영향을 받으면, 내 작품은 모방이 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영화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말하기 힘들 정도다. 존 포드는 매우 기분좋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 〈3인의 대부>에서 세명의 악당은 아기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악당도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도쿄 갓파더즈>에 영향을 주었다. 빌리 와일더와 프랭크 카프라도 좋아하지만, 내 영화와 구체적인 관련이 있는 감독은 조지 로이 힐이다. <슬로터하우스 파이브>는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영화여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가프>는 <도쿄 갓파더즈>에 자극을 주었다. <가프>는 한마디로, 인생은 농담이다, 라고 말해주는 영화다. 주인공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 나는 1960년대에 태어났다. 내가 십대가 되었을 때는 이미 일본영화의 황금기가 지났고 유럽영화는 수입도 되지 않아서 미국영화말고는 볼 수 있는 영화가 많지 않았다.

<천년여우>는 작곡가 히라사와 스스무로부터 영감을 받기도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식으로 영감을 주고받았는가.

오래전부터 히라사와 스스무(<베르세르크>)의 굉장한 팬이었다. 히라사와 스스무는 과학과 신화의 이미지가 공존하고, 밝음과 어둠이 함께 있는 음악을 만든다. 그의 음악이 있어서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천년여우> 같은 독특한 애니메이션이 나올 수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천년여우>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도쿄 갓파더즈> 이후 처음 만드는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이다. 미안하지만 아직 내용은 밝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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