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남자들의 한이 출몰한다, <알포인트>
2004-09-01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여성 -> 남성으로 공포영화의 젠더를 치환한 전쟁 호러 <알포인트>

1972년 베트남전 당시 한국 군인들의 실종을 다룬 <알포인트>에 주목하는 것은, 이 영화가 피해자(냉전시대, 미국의 용병)면서 동시에 가해자인 한국의 베트남에 대한 역사적 부채 의식이 어떻게 다루어지는 지 볼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 근대사가 허용하는 가장 일반화되고 설득력 있는 시선은 피해자의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로, 미국의 신식민지 분단국가로 그리고 내부 군사독재 등으로 한국 근대사에 대한 재현에서 한국 피지배계층의 삶은 희생과 피해의 역사로 그려진다. 여러 평자들이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살인의 추억> <효자동 이발소> 등 최근 실화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영화들은 바로 이런 근대사의 희생자인 피해자들의 시점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고 자기 설명하는 <알포인트>가 위와 유사한 피해자의 시점을 취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혹은 불가능해야 한다). 지난 몇년간 ‘베트남전 진실위원회’나 ‘베트남 양민학살 대책위’, ‘<한겨레21> 베트남 캠페인’에서 드러났듯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을 미국 지배하 냉전의 피해자로만 놓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포인트>는 희생자로서의 한국인의 정체성이 아닌 가해자와 희생자라는 이중 정체성에서 배태되는 자기 성찰성, 바로 그 진동을 가늠할 수 있는 예민한 실험의 장이 될 수 있다.

가부장제가 낳은 여자의 한 → 냉전체제가 잉태한 남자들의 한으로 치환

<알포인트>에서 가장 탁월한 점은 공간을 역사화한 뒤 유령의 출몰을 중첩시킨 것이다. 이 영화에서 알포인트라는 지대는 전투 공간에 각인된 폭력의 흔적이라는 구체성을 지시하지만 동시에 역사적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어떤 불분명한, 불현성의 공간을 가리킨다. 그 불현성 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산 자가 아니다. 죽은 자가 그 현장 보존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은 산 자의 우위에 선다. 보이지 않는 자가 보이는 공간에 대한 소유를 주장할 때, 귀신들린 장소는 불현성의 감염을 확산시킨다. 영화 속의 인물과 관객이 그 대상들이다. 제목 ‘알포인트’는 로미오 포인트. 영화사 보도 자료에 의하면 로미오 포인트는 극비 진행되는 실종자 구조 작전을 뜻하는 로미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지역이다. 이 군사용어는 줄리엣이 로미오를 은밀히 만나러 가는 데서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 알포인트는 호치민시 서남부 150km, 캄보디아 접경에 있는 섬이며 프랑스군이 휴양지와 군병원을 설립했던 곳으로 1949년 호치민의 게릴라군과 교전 중이던 프랑스군 소대 12명이 원인없이 실종된 적이 있다. 이후 1972년 한국 맹호부대 소속 소대원 9명이 실종되고, 6개월간 사단 본부로 구조 요청 무전이 온 적도 있다. 더구나 이곳은 베트남전 이전 중국군이 베트남인들을 학살한 현장이기도 하다. 이 알포인트에 서 있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풍의 퇴락한 건물은 최태인 중위(감우성)와 함께 이 영화의 주인공 중 하나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알포인트의 역사적 상흔은 남한의 거울 이미지이기도 하다. 알포인트에서 발생했던 중국인에 의한 베트남인 학살 사건, 그리고 그 지대를 배회하는 미군 유령을 보고 있으면 베트남과 한국이 공유하고 있는 근대사의 장면들이 당연히 겹친다. 이중노출되는 것이다. 예의 영화주인공 중 하나인 프랑스 식민지풍 건물은 무의식중에 폐허화된 철원의 노동당사 건물(서태지 3집 <발해를 꿈꾸며>로 유명해진)에 이중인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부지불식간의 역사적 이중인화를 결정적으로 훼손하는 것은 물론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 군인들의 존재다. 이들이 베트남과 접촉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정식명칭으로는 남베트남해방민족전선인 베트콩 게릴라와의 교전이 그 하나이며, 베트남 여성과의 성접촉(매매춘)이 그 나머지다. 교전의 결과는 죽음이나 부상이고 성접촉의 결과는 매독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최태인 중위는 베트남 여성과 성관계를 하다가 총소리를 듣게 되고, 복도에서 마주친 말끔한 복장을 한 다른 베트남 여성에게 총격을 가하게 된다. 그녀의 청소용 도구 사이에서 총이 발견됨으로써 오발이 아니었다는 것은 밝혀지지만, 이 두개의 시퀀스에서 드러나는 것은 한국 군인이 베트남을 여성으로 젠더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폭력과 매매춘을 통해 접촉한다는 것이다. 여성화된 베트남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 무엇으로 변장해 불현듯 목숨을 노릴 수 있는 게릴라이며, 거기다 창녀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것이 이들의 공모에 의해 희생된 전우의 시신을 최태인 중위가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 전반부에 쾌락과 매독과 적대와 죄의식이 중첩된 일종의 크리스털 이미지가 하나의 타래로 구성되고, 이후는 이런 이미지의 결정체를 환유 작업, 즉 치환 작용을 통해 좀더 정교한 과정으로 풀어내게 된다.

알포인트가 제공하는 미장센은 이 치환의 무대다. 그리고 거기서 공포영화의 관행이 본격적으로 가동된다. 우선 귀신들린 집을 포함하는 장소의 유령적 공간화, 귀신의 형상화, 그들의 등장에 따른 서사 공간의 분열, 또 그 서사 공간으로 난입하는 귀속처가 불분명한 음향들이 그것이다. 폐허와 폐가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무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죽은 군인들이 보내오는 구원 요청으로, 이미 죽은 부대원들이 전송하는 음향이 영화의 처음을,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죽어간 부대원들이 보내는 것이 영화를 종결시킨다. <알포인트>에서 사용되는 이러한 음향 효과는 여자 귀신들이 등장하는 한국 공포영화의 관행에 작용하는 젠더 장치를 뒤집어 사용한 것이다. 여귀곡성이 남귀곡성으로 바뀐 것이고, 맥락상으로는 가부장제가 낳은 여자의 한으로부터 냉전체제가 잉태한 남자들의 한으로 변환된 것이다. 여기서 또 한번의 꾐은 위에서 언급된 크리스털 이미지인 게릴라이며 창녀인 베트남 여성이 귀신의 형상으로 최종적 치환을 한다는 것이다. 영화 속의 모든 귀신이나 유령이 전쟁으로 오염된 살아 있을 때의 차림으로 등장하는 데 비해 베트남 복장을 한 여귀는 전혀 더럽혀지지 않은 순백의 차림새로 등장한다. 이러한 진행 구도에서 볼 때 이 영화는 하위 장르적 관행으로는 한국의 여귀영화에 볼모잡히고, 정치적으로는 베트남의 여귀에 의해 신체가 파열되는, 한국 군인들의 이중처벌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타자를 여성화하기라는 익히 알려진 수사법임을 생각할 때 이라크 파병문제가 한국의 주권 및 인권과 관계된 중대 현안으로 제기되고, 베트남전을 냉전구도 속에서 세계사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틀이 가용 가능한 당대의 자기성찰로서는 구시대적 재현 채널이 동원된 셈이다.

영화 속에 각인된 사실 : 한국은 미국과 공모한 가해자

결국 영화는 중국군에 의해 몰살당한 베트남인과, 바로 원귀화한 그들이 비명횡사시켰다고 추정케 하는 프랑스군, 미국군 그리고 한국군, 이들 모두를 알포인트에 출몰시키지만, 영화가 이들을 정치적으로 위치시키는 방식은 잘 들리지 않는 무전기 소리만큼이나 매우 모호하다. 즉, 이 모든 원귀들을 비차별적으로 동정해야 하는 것인가, 한국군에만 연민의 시선을 보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가장 큰 피해자인 베트남인들에게 우리의 자성을 바쳐야 하는 것인가?(물론 그렇다!) 영화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포지셔닝은 좋게 말해 인도주의적이요, 그 반대 어조로 말하자면 나이브하다. 결국, 알포인트라는 저주받은 대지는 저주를 풀지 못하고 있고, 우리의 성찰의 타래도 풀리지 않는다.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표명하지 못하게 하는 자기연민은 물론 피해의식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한국이 미국이라는 가해자와 공모한 하위 가해자란 사실은, 알포인트에 오히려 층층 각인되어 있다. 한국군 역시 중국, 프랑스, 미국에 이어 알포인트에 침입자로 들어왔다가 돌아가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프로듀서인 장윤현이 <텔미썸딩>에서 삼일고가도로 위에 버려진 검은 비닐 속의 시체더미들을 통해 포스트 독재의 증후를 도시 공간 위에 펼쳐놓은 것처럼, 영화 <알포인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포스트 베트남의 정치적인 증후 이미지는 알포인트 그 자체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2002년 만들어진 <데스워치>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영화와 공포 장르를 절합시킨 방식이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영국과 독일의 접전을 다루는, <데스워치>는 영국군의 시선에서 본 <서부전선 이상 없다>류로 시작했다가, 궁지에 몰린 영국군이 독일군의 시체가 즐비한 참호 속으로 뛰어들면서 이성적 설명을 뛰어넘는 사건과 만나게 된다. 가시철조망이 사람의 몸속으로 파고들어가 목을 따고 나오는 등 <데스워치>의 어떤 부분들은 상당히 하드고어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생존하는 영국군은 중대원 중 가장 어린 찰리 셰익스피어(<빌리 엘리어트>의 제이미 벨)로 영화는 이 청년의 악몽의 입사식으로 읽힌다. <알포인트>에서 찰리와 가장 유사한 인물은 오태경이 맡은 장영수 병장이다. 그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입대해 어머니에게 송아지를 사주려고 알포인트에 지원한다. 그러나 <데스워치>의 참호가 적군의 시체가 즐비한 악령 깃든 아비귀환으로 기능함에 비해 위에서 강조한 대로 <알포인트>의 공간의 정치학은 훨씬 더 중층적이다. 그리고 전자의 대립 구도가 영국군과 독일군으로 명확히 나뉘어 있는 것에 비해 후자의 적과 아군은 뒤죽박죽 경계를 짓지 못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나중에 완성되어 <알포인트>가 <데스워치>의 영향 아래서 읽힌다고 하더라도, <알포인트>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보다 훨씬 더 두터운 텍스트다.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풀어내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작업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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