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호는 강하고 무서운 인상으로 새겨진 배우다. 무자비하게 살인을 지시하는 <파이란>의 보스 용식과 마음 착한 여자를 파멸로 몰고가는 <인디안 썸머>의 남편, 정글처럼 잔인한 <알포인트>의 진 중사는 모두 가파르고 물기없는 남자들이었다. 당연하게도 다소 겁을 먹고 기다리고 있던 카페로, 그 겁나는 배우가, 조금 늦어 아이처럼 씩씩거리며 들어섰다. 그리고 글로는 옮길 수 없는 몸짓과 억양으로, 매우 친절하고 재미있게, 연기보다도 삶을 더 많이 들려주었다. 이십년을 무대에서 보낸 손병호는 영화 몇편으로 그 파장 전체를 가늠할 수 있는 배우가 아니었다. 스무살 무렵, 가난한 집안에 당장 도움이 될 것 같아 연기학원에 들어갔던 손병호는 연극을 하면서 돈이 아닌 꿈을 손에 쥐었다. 그는 포스터 붙이러 갔던 극장에서 <하녀들>을 보고는 “숨이 막히는 거다. 저거구나. 너무 아름답구나” 싶어, 돈벌겠다는 애초 취지와는 달리 서울예대에 입학하기에 이르렀고, 송일곤 감독의 단편 <소풍>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오직 외길을 걸었다. 가난도 무명도 다치게 할 수 없었던 배우. 그는 폭력에 물든 남자들보다는 고운 말투로 연인을 타박하며 술주정하는 <꽃섬>의 게이 뮤지션에 가까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알포인트>는 캄보디아에서 촬영했다. 연극도 하고 있는 배우가 몇달 동안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감독이 두명 바뀌면서 촬영이 1년 동안 지연되기까지 했다.
=연극보다 영화가 돈을 많이 주니까. (웃음) 연극을 중심에 두고 싶기는 하지만 생활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는다. 지금 <백마강 달밤에>를 연습하고 있는데 해남에서 찍는 영화 <먼 길> 때문에 연습에 자주 못 나가서 걱정이다. <알포인트>는 시나리오가 참 마음에 들었다. 이 영화가 한 시간 반이 넘게 긴장을 끌고가는 것도 시나리오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알포인트>는 주제가 선명하고, 소대원 아홉명이 각자의 비중이 있고, 공포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아픔이나 죄책감이라고 말하는 영화다. 그래서 1년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촬영이 늦어져서 좋았던 점도 있다. 배우 아홉명이 3박4일 동안 해병대 훈련을 받았는데, 한명도 떠나지 않고 1년 동안 기다리면서, 술마시고 서로 알아가는 과정을 거쳤다. 그게 뭉칠 수 있는 힘이 된 것 같다. 뭐 다들 바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웃음)
-촬영 도중에도 힘든 일이 많았을 것 같다. 동굴 안에서 스물여덟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촬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나 혼자 나오는 장면이었다. 내가 웬만하면 부딪치는 사람이 아닌데 그땐 처음으로 부딪쳤다. 감독은 눈을 크게 뜨라고 하고, 촬영은 잘 안 보인다고 하고. 내가 눈이 작나? 하는데 카메라가 저 멀리서 잡고 있는 거다. 화가 나서 그럼 당신이 와서 눈 크게 떠봐라 그랬다. 촬영감독이 시사회에 와서야 내가 자기 대학 선배라는 걸 알고는 왜 말 안 했느냐고 하더라.
-공수창 감독은 손병호씨가 반장처럼 배우들을 다독여줬다면서 고마워했다.
=내가 <알포인트> 팀 전체에서 서열 2위였다. (웃음) 후배들을 많이 다그치기도 했는데 다들 잘 따라줘서 내가 고마웠다. 배우 열명을 한우리에 몰아넣고 영화를 찍었으니 스트레스가 없었겠는가. 하지만 나는 현장이 자유롭고 편하고 웃음이 있어야 좋은 영화가 나온다고 믿는다. 배우는 긴장이 적이다. 내키지 않는 현장에서 일하면 배우에게도 영화에도 손해가 된다. 그러니 내가 선배로서 할 일이 뭐겠는가. 여기 가서 이 사람 말리고 저기 가서 저 사람 말리는 거지. (웃음) 연기는 인간을 이해하는 작업이다. 나는 저 사람이 왜 저럴까, 왜 저런 말을 할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면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무명 시절을 오래 겪었다.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연기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금방 깨달았을 텐데.
=조금 지나고 나니까 돈보다 연극이 중요해지더라. 열아홉이던가 스물이던가 신문에 난 연기학원 광고를 보고 돈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소룡은 내 영웅이었고, 언젠가 이소룡처럼 액션배우가 되고 싶기도 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대한극장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은하수, 미리내 이런 아동극단이 있었다. 거기 들어가서 처음 연기한 게 <들장미 소녀 캔디>의 닐이었다. 내가 악역처럼 생기긴 했나보다. (웃음) 연기도 하고 포스터도 붙이고 하다가 장 주네의 <하녀들>을 보고 이게 연극이구나, 공부해야겠구나, 마음먹게 됐다. 서울예대에 시험을 본 것도 그래서였다. 정말 학교에서 살았다. 어느 학교에 다니든 배우가 되려면 거기에서 살아야 한다. 자기가 무대를 만들고 밤새 연습하고. 지금도 학교에 가면 여기저기 내가 땀흘린 흔적이 보이는 것 같다.
-극단 목화에 몸을 담았고, 연극배우로서의 명성도 그곳에서 얻었다.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
=선배인 정원중씨가 제안을 했고, 오태석 선생이 연출하는 목화의 연극도 너무 좋았다. 내가 꿈꾸던 연극이었다. 그래서 들어갔는데, 오태석 선생이 몇달이 지나도록 나를 볼 때마다 “너 누구냐?”고 묻는 거다. 그게 앙금이 돼서 저 인간이 “야 손병호. 나랑 작품 하나 하자” 하는 순간이 오면 내가 하나봐라 그랬다. 그런데 그게 오태석 선생이 배우를 키우는 방법이다. 연극은 황무지고 먹을 것도 없다. 살아남는 놈만 살아남는 거다. 요즘은 술 마시면 오태석 선생이 “내가 쟤 이름 물어볼 때마다 표정이 어땠냐 하면…” 그러신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단련을 시킨 거다. 내가 연극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것도 오태석 선생이 연출한 연극 <심청이는 왜 두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덕분이었다. 그 연극은 대박이 나서 자유소극장에서 오태석 연극제를 할 때 600명이 극장에 몰려와 무대가 없어질 정도였다. 그때 취객 연기를 했는데 연극하는 사람들이 거의 다 그걸 봤고, 술 취한 연기는 손병호가 최고라고 했다. 그때까진 내가 선배들에게 인사하면 아, 후배인가보다, 이 정도였다. 그런데 선배들이 “네가 손병호냐? 와서 술 한잔 해라” 그랬다. 정말 신이 나던 때였다.
-꿈꾸던 연극이란 건 무슨 의미인가. 극단을 만들어 연출을 하기도 했는데.
=연극은 연극적이어야 한다. 매직 같고 에너지가 넘치고 새로운 힘이 느껴지는. 오태석 선생의 연극이 그랬다. 에너지가 느껴지고 단단하고 상상력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건 무대만이 줄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런 연극이 처음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커피도 이거 무슨 맛이야? 이러다가, 익숙해지면 콜롬비아산 원두가 좋다더라, 이렇게 되지 않나.
-무용을 하는 아내 최지연씨와 공동작업을 해온 것도 그런 맥락이었나.
=그렇다. 오태석 선생이 연출하는 작품에서 처음 만났고, 그 다음에 둘이서 공동작업을 하게 됐다. 여성적인 매력을 느꼈으니까 계속 만나기도 했겠지만(웃음), 무용을 보면서 저게 진짜 연극적인 거구나 싶었다. 몸짓은 어디에서나 통하는 언어니까. 그런데 그때는 화를 많이 냈다. 연극은 프롤레타리안데 무용은 너무 부르주아인 거다. 쓸데없는 일에 돈도 많이 쓰고. 우리는 다 만들어서 하지 않나. 너무 화가 나서 공연 끝나고 술자리에서 뒤엎었다. 그리고 삼일 동안 집에서 머리 처박고 후회했다.
-최지연씨와는 송일곤 감독의 <소풍> <꽃섬>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9월에 개봉하는 송일곤 감독의 <거미숲>에도 의사로 출연했는데, 특별히 잘 맞는 점이 있었던 건가.
=송일곤 감독과는 가족처럼 지내는 사이다. 원래 송일곤 감독은 내가 아니라 <라이방>에 나온 조준형씨를 캐스팅하려고 했다. 그런데 자기는 연기하는 사람 아니라면서 계속 거절하는 최지연씨를 만나러 올 때마다 옆에 내가 있는 거다. 그러다 “저 죄송한데, 두분 참 잘 어울린다. 사진 한장 찍어가도 되겠냐”더니 나도 함께 출연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는 거다. 송일곤 감독이 들고온 <간과 감자>를 봤는데 영화가 너무 좋았다. 카메라도 잘 몰랐지만 그래서 출연하기로 했다. 처음 찍은 분량은 다 버렸다. 송일곤 감독이 마음이 급해서 안면도로 차타고 내려가는 도중에도 계속 찍어대는 거다. 나는 영화가 처음인데. 결국 그날 밤 여관방에서 술 한잔 돌리고 서로 얼굴도 익힌 다음에야 영화를 제대로 찍을 수 있었다. 마음을 비워야 길이 보이는 거지. 그거 찍던 3박4일 동안 정말 즐거웠다. <거미숲>에선 원래 1인7역을 하기로 했다. 시나리오가 바뀌기도 했고, 송일곤 감독이 “주연이 감우성인데 아무래도 친구 사이로 보이긴 힘들 것 같아…” 그래서(웃음) 의사만 하기로 한 거다. <거미숲>을 보고 욕을 좀 했다. 나는 송일곤 감독이 <꽃섬>처럼 자기 만들고 싶은 영화를 쭉 만들었으면 좋겠다.
-우연히 영화를 시작했는데도, 몇년 사이 꽤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끌리는 점이 있었나.
=<소풍>보다는 <유령> 때문에 계속 영화가 들어온 것 같다. <유령> 조감독이 <천년의 수인>을 보러왔다가 캐스팅을 했는데, 매체가 편해진 건 <파이란>부터였다. 최민식과 송해성 감독과도 친해졌고. 아무것도 몰랐다가, 영화에서도 배우가 해야 할 몫이 있다는 걸 지금은 알겠다. 건방져진 거지, 영화 몇편 했다고. (웃음) 영화는 TV와 달라서 한팀이 되는 게 좋다. 사실 영화를 했으니까 결혼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었던 거겠지. 혼자 지낼 때는 죽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더 좋은 집에 살고 싶고, 돈도 벌고 싶다. 사람 욕심은 끝이 없더라. 그런데 그 욕심이 나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 때문에 생긴다. 책임질 사람이 있으니까 마음이 쓰라릴 때가 있더라고.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에서 악역을 주로 연기해왔다. 고정된다는 느낌은 없는지.
=너무 강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기는 했다. 다행히도 감독들이 촬영 끝나고 나면 내 다른 모습을 봐준다. 술마시면서 만나면 코미디언 같고 재미있으니까, 다음에는 코미디영화 하자고 한다. 다른 감독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전해주고. 그래서 지금은 영역이 많이 넓어졌다. 그리고 나는 감독들에게 욕을 먹지 않는다. 연기력이 좀 달려도 사람 좋은 배우를 쓰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먼 길>은 한동안 촬영을 중단했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시작했다. 무슨 사정이 있었나.
=투자사에선 장사가 안 될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형편이 어렵기도 했겠고. 하지만 <먼 길>은 진짜 좋은 영화가 될 거다. 은근한 재미, 삶의 깊이가 있다. 이렇게 현장 분위기가 좋았던 적도 처음이다. 지금도 빨리 가고 싶어서 죽겠고, 어머니 역을 맡은 고두심 선생도 해남병에 걸려서 서울에 있으면 안달복달 내려가고 싶어한다고 한다. 현장에 가면 영화 오래한 선배들과도 재미있고 편하게 지내고, 구성주 감독도 나를 너무 귀여워해줘서 미치겠다.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