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 청년에게 대단히 실례되는 말이지만, 오태경은 참 잘 자랐다. 열살 꼬마에겐 요령부득이었을 <화엄경>에서 몸은 소년이면서 부처의 마음을 품은 선재를 연기하며 영화와 맺은 인연을, 요란하진 않지만 진득한 애정으로 가꿔온 그가 건장한 ‘국군 아저씨’가 되어 <알포인트>로 돌아왔다. 어머니에게 소 한 마리 사드리겠다는 소박한 희망으로, 실종자 수색 작전에 참여하는 막내 장 병장 역의 오태경은 이즈음 <알포인트>의 흥행이슈만큼이나 뜨겁게 거론되는 배우. 늦더위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며 나타난 오태경은 “영화가 잘돼서 너무 좋다”고 함박 웃음을 지으면서도, “싸이 미니홈피에 1촌 신청하는 분들이 많아져서 고민”이라고 난처한 기색을 보인다. 16년 경력 연기자 오태경은 처음 치르는 ‘유명세’에 영 적응이 안 된다는 표정이다.
다 지난 얘기지만, <알포인트>의 제작과정엔 우여곡절이 많았고, 작품 속 오태경의 운명도 그랬다. 애초 주어진 역할은 장 병장이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유 일병이라는 인물로, 제일 먼저 공포를 감지하고 미쳐가는 ‘쎈’ 연기를 보여주게 돼 있었다. 막상 캐스팅 결정이 나니까 겁이 나서 발을 빼려 했단다. “쫄았던 거죠. 바보처럼.” 이런저런 사정으로 지연되는 동안 ‘엎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그런가 보다’ 했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역할은 장 병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른 가슴앓이를 하는 소년이죠. 돈 벌겠다고 형 영장 들고 군대 오고, 완전히 꼴통이잖아요.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나 향수가 더 사무쳐 보인 것 같아요.” 폭염과 강행군의 3개월, 캄보디아에서의 시간들이 더 힘겨웠던 건, ‘형님들’과의 앙상블을 위해 2배로 열심히 뛰어야 했기 때문이다. “형님들이 연기를 너무 잘하셔서, 다른 욕심을 낼 수가 없었어요. 따라가기 바빴으니까.” 틈틈이 족구도 하고 포커도 하고 맥주도 마시던 ‘그 시절 그들’과의 ‘끈끈한 추억’이 그에겐 작품 못지않은 소중한 자산으로 남았다.
그간 <화엄경>의 선재는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조금씩 자라왔다. <육남매>의 첫째, <허준>의 아들,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이요원의 남자친구, <올드보이>의 어린 오대수,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의 순진한 고등학생 등이 그가 거쳐간 인물들. 7살 때 “극성맞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억지로’ 연기에 발을 들였지만, 스스로 연기를 재밌어하고 좋아하게 된 건 <육남매>부터다. “공부도 안 했고, 기술도 안 배웠고, 할 수 있는 게 연기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재밌어지기 시작했고요.” 주로 어른스러운 역할만 했지만 오태경은 그의 분신들이 실제 자기 모습과는 딴판이라고 잘라 말한다. “오죽하면 친구들이 저더러 이중인격자라 그러겠어요.” 그러면서도 <알포인트>의 마지막 독백신만큼은 장 병장과 오태경을 구분지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일부러 리허설도 안 했어요. 대사 연습만 하고 슛 들어갔는데, 눈물이 철철 쏟아지는 거예요.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쳐 떠오르면서, 3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간절해지더라고요. 촬영 끝나고도 한참을 울었어요.”
오태경은 일찍 연기를 시작했지만, 방황하던 사춘기를 제외하면, 자기 페이스를 잃은 적이 없다. 출연한 영화와 드라마 중에서 오디션 없이 합류한 작품 없고, 아역배우로 얼굴 알려졌다고 못한 일도 없다. 스스로 용돈 벌어보겠다고 고깃집, 호프집, PC방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여기서 왜 이러고 있냐”는 뜨악한 반응에 “일하는 거다”라고 태연하게 응대한 일도 여러 번이다. 그리고 지금의 바람은 ‘아역 탈피, 성인 신고’ 이런 게 아니라, 그냥 ‘배우’가 되는 것이다. “아역은 아역일 뿐이죠. 저는 지금 성인이거든요. 역할 가리고 싶지 않아요. 연기가 좋아지면 차차 바뀌어가겠죠. TV 오락프로 출연해서 인지도 쌓는 것도 좋겠지만, 거기선 제가 인정받을 게 없거든요. 돈은 많이 안 벌어도 돼요. 영화 보고 나오면서 사람들이 ‘역시 오태경’이라고 인정해주는, 그런 배우가 될 때까지 저를 업그레이드하고 싶어요.” 그랬다. 오태경은 듬직한 성인이 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