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기억상실증과 싸우는 영화 <알포인트>
한국에서 ‘자기성찰적’인 베트남전 영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베트남전이 끝나고 2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정지영 감독의 <하얀 전쟁>(1992). 할리우드의 <지옥의 묵시록>(1979)이 불과 몇년 만에 나타난 것에 비하면, 너무나 늦은 것이다. <하얀 전쟁>은 그 때늦음의 이유를 스스로 드러낸다. <하얀 전쟁>은, 79년 10·26 사태로 열린 정치적 공간에서 베트남전의 서사화를 시도하는 한 소설가의 시점을 빌려서야 베트남전의 악몽을 스크린으로 옮긴다. 92년에, 79년의 시점을 빌려 진행되는 베트남전의 영화적 서사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징후인 셈이다. 베트남전 이후 20년간의 한국 정치사가 강요했던 한국영화의 집단적 기억상실증. <하얀 전쟁>은 그 때늦음을 보상하기라도 하려는 듯, 10년 이상 그 서사화의 시점을 앞당기고 있다.
그로부터 1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현재, 또 한편의 베트남전 영화가 우리의 스크린을 찾아왔다. ‘전쟁 공포’라는 형식으로 귀환한 <알포인트>. <하얀 전쟁>이 리얼리즘이라는 80년대 한국영화의 멘털리티 속에서 시도된 베트남전의 영화적 서사화라면, <알포인트>는 ‘호러’라는 장르적 화법에 기대어 그것을 수행한다. 일견, 그것은 일종의 퇴행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얀 전쟁>이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병사들의 양민 학살에 대한 죄의식을 그 ‘악몽’의 한 이미지로 뚜렷이 드러내는 반면, 역시 죄의식을 공포의 한 원인으로 언급하는 <알포인트>(“전쟁에서 살인을 한 사람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건 죄의식이 아닐까.” - 공수창 감독, <씨네21> 468호)는 이상하리만치 그런 이미지를 배제하고 있기에 더욱더 그러하다. 어찌보면 그것은 마치 할리우드가 걸어왔던 과정을 거슬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할리우드는 <택시 드라이버>(1976)나 <지옥의 묵시록>을 통해 베트남전으로 인한 자기분열증과 공포를 드러내고, 양민 학살이라는 외상은 <플래툰>(1986)에 와서야 뚜렷이 드러낸다). 그렇다면 <알포인트>는 ‘호러’라는 현재적 트렌드에 기대어 역사를 거스르고 있는 퇴행적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알포인트>는, 그 영화적 세공술의 부족에도 불구하고(어쩌면 그것 때문에), 이전의 모든 베트남전 영화를 뛰어넘어서는 ‘두터운 텍스트’이다. <알포인트>는 ‘호러’라는 장르의 외피를 쓰고 수행되는 우리 시대의 역사적 기억상실증과의 싸움이다.
피아불식(彼我不識)- 베트남이라는 ‘타자’에 대한 공포
사실 ‘전쟁 공포’라는 것은 동어반복일 수 있다. 전쟁은 그 자체가 공포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것이 베트남전을 다루는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베트남전은 피아식별조차 쉽지 않은 열대의 밀림 속에서 진행된 전쟁이고, 보호해야 할 양민과 섬멸해야 할 베트콩의 구별조차 힘들었던 전장없는 전쟁(게릴라전)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베트남전 영화는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이 겪어야 했던 공포의 한순간을 담아낸다. 보이지 않는 적으로부터 날아오는 총알로 인한 공포. 그 공포로 인한 과잉방어 속에서 양민을 학살하고, 그럼으로써 한층 더 증폭되는 죄의식으로 인한 공포. 그런데 정작 본격 ‘전쟁 공포’를 표방하고 나선 <알포인트>에는 그러한 영화적 클리셰가 없다. 주인공 최태인 중위(감우성)가 쏘아죽인 베트남 소녀를 제외하면, <알포인트>의 한국군 병사들은 베트남인을 단 한명도 죽이지 않는다(최태인 중위의 행위는 정당방위로 밝혀지고, 나머지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총을 쏜 참호 속의 베트남 여자조차 사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그 공포의 공간으로 끌려들어가야만 하는가?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그 공포의 공간으로 끌려들어가는가? <알포인트>의 텍스트적 무의식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이런 의문들과 대면해야만 한다.
거듭 말하지만,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병사들은, 단지 일반적인 ‘전쟁의 공포’만을 느낀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공포와의 전쟁’을 수행해야만 했다. 그들이 조우해야 했던 그 ‘공포’의 다른 이름은, 도저히 가시화되지 않는 베트남이라는 ‘타자성-타자의 욕망’이다. ‘월남 해방’과 ‘자유 수호’라는 화려한 명분과 함께 출발했던 병사들은 베트남에서, 열대의 밀림처럼 끈질기게 자신들의 침입을 거부하는, 그 타자성과 조우하게 된다. 자신들이 ‘해방’시키고자 하는 베트남 민중은 그것을 고마워하기는커녕 베트콩들과 구별 불가능하게 뒤섞여 있다. 전장이 따로 없는 전쟁. 그들은 타향에서의 객고조차 편한 마음으로 풀지 못한다(창녀촌에서 “내 이럴 줄 알았어!”라고 내뱉으며 숨을 거두는 병사). 열대의 태양 아래 순식간에 증발해버린 명분과 이념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생존본능과 하나라도 더 많이 챙겨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계산이다. <알포인트>에서 과거-유령의 침입은 바로 그러한 균열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대부분의 베트남전 영화 특히 <하얀 전쟁>과 <알포인트>의 텍스트적 무의식을 갈라놓는다.
<하얀 전쟁>이 현재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고 끝나는 반면, <알포인트>는 과거로부터의 무전으로 시작되고 끝이 난다. <하얀 전쟁>이 현재의 시점에서 외상적 과거를 서사화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였다면, <알포인트>는 과거-유령에게 사로잡혀 무한한 과거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전자가 베트남전 참전 ‘이후’의 외상적 경험(특히 양민 학살에 대한 죄의식)을 체제의 문제와 연루시킴으로써 스스로의 부채의식을 덜고자 하는 한 주체의 서사화라면, 후자는 체제로부터 고립된 채 끝도 없이 역사(베트남이라는 타자성의 근원)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한 주체를 그리고 있다.
‘피아불식’은 근본적으로 ‘타자의 욕망’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타자의 욕망은 쉽게 초자연적인 어떤 힘으로 신비화된다. ‘알포인트’의 저주받은 저택과 사원, 그리고 그 공간에 출몰하는 하얀 아오자이 소녀의 형상,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제3의 시선…. 흥미로운 것은, 정작 그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를 제대로 보거나 느끼는 것이 오로지 최태인 중위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머지 병사들은 자신들의 현재(특히 자신의 공범의식 또는 죄의식)와 연루되어 있는 미군-유령과 한국군-유령만을 본다. 베트남 참전 이전의 과거로부터 귀환한 프랑스 병사들 유령(무덤)과 그들과 연루된 소녀의 유령을 보는 것은 오로지 최태인 중위이다. 그래서 최태인 중위라는 캐릭터는 문제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알포인트’(베트남)로부터 초대받아 그곳에 간다(영화 초반 그에게 “Sleep, sleep…” 하고 최면을 거는 창녀. 그리고 알포인트 작전 임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베트남 소녀-게릴라의 사살). 그는 자신들이 ‘알포인트’(베트남)에서 마주쳐야만 하는 것의 정체를 알고 있는(최소한 이미 느끼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나머지 병사들이 과거-유령에 빙의되는 순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관등성명’(과거-유령의 귀환에 저항하는 상징계의 호명) 복창임을 알고 있는 그는, 그 부름에 응하면서 동시에 그 부름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허약한 상징계는 이미 무력하다. 그는 짧은 순간 베트남이라는 타자성의 근원을 상징하는 이미지들과 접하고 끝내 ‘자살’한다(이미 소녀-유령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가 장 병장에게 발사 명령을 내리는 것은 분명 자살-행위일 것이다).
불귀(不歸) - 역사와 마주치지 않는 한, 돌아오지 못하리
최태인 중위의 ‘타자-되기’는 그렇듯 짧고 불완전하게 끝이 난다. 그리고 그것은 <알포인트>라는 텍스트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솔직함 또는 절망이다. 텍스트 속에서 과거-유령의 귀환에 대한 유일한 저항수단이었던 ‘관등성명’ 복창은 허약하고 무기력한 것이었지만, 현실이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그것은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송식은 고사하고 명분의 축적조차 스스로 포기한 채 도망치듯 이루어진 이라크 파병. 국익 또는 자본의 이해라는 이름의 그 힘. 어쩌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한계 때문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파병 반대는 우리의 젊은이들의 희생 가능성에 대한 호소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초유의 청년 실업 사태 탓이었겠지만, 자발적으로 지원해서 그곳에 갔다. 그리고 체제는 그러한 희생의 가능성이 없음을 자신하거나 과장하고 있다. 베트남전이 남긴 교훈은 진정한 ‘타자-되기’의 필요성이었다. 또 하나의 타자로서의 이라크 민중의 진정한 바람과 욕망을 알지 못하면서 감행된 또 한번의 파병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상대의 고통의 진정한 원인과 바람을 무시하고 이루어지는 파병은 ‘침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알포인트>는 때늦게 그리고 불완전하게나마 그런 ‘타자-되기’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고 두터운 텍스트임에 틀림없다. 이 두터운 텍스트가 전하는 마지막 교훈. 진정한 타자-되기를 통해 역사와 마주치지 않는 한, 그 역사는 끊임없이 귀환(歸還)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돌아올 수 없다(不歸)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