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 시선의 중심에 집시여인 카르멘(파즈 베가)의 몸이 있다. 영화는 작가 메리메의 분신일 프로스퍼(제이 베네딕트)에게 들려주는 호세(레오나르도 스바라글리아)의 회고담을 통해 카르멘에게 다가간다. 그곳에서 카르멘의 몸은 호세가 욕망하는 대상이지만 결코 소유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호세의 눈인 카메라는 그의 감정선을 따라 부산하게 그녀를 뒤쫓는다. 카르멘은 클로즈업과 이중인화, 질투 섞인 관음의 시선 속에 존재한다. 이때, 호세의 시선은 그녀를 소유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호세 또한 온전히 시선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앞둔 호세의 고해성사를 듣는 이는 프로스퍼이다. “난 얘기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작가거든요”라고 말하는 이 호사가에게 호세는 이야기의 노예와 다름없다. 그의 이야기는 프로스퍼의 글에게 위안이 아닌 슬픔‘도’ 주는 ‘소재’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쇄된 타자화의 장치는 몰입의 거리를 조절하면서 격정적 멜로를 우아하게 만든다. 여기에 프랑코 독재정권의 상흔을 간직하며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 비센테 아란다는 “자유냐 명령이냐”의 문제를 겹쳐놓으며, 카르멘이라는 인물을 다시 쓴다. 당시 종교재판을 부활시키고 자유주의와 헌법주의를 억압했던 ‘폭군’ 페르디난드 7세의 이름이 자꾸 언급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대척점에 있는 ‘마녀’ 카르멘은 자신의 원칙, 즉, 자유를 버리는 것이야말로 존재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라 여기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호세는 자신의 진심이 프로스퍼에게 흥밋거리로 전락하는 상황에서도 그의 사랑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카르멘으로부터 명령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그들은 타자화된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돌출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