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리(30)의 턱이 뾰족해졌다. 탐스럽게 늘어뜨린 긴 생머리는 〈박하사탕〉 이후 처음이다. 게다가 카메라가 자리에서 물러나면 수시로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머리카락, 얼굴 매무새도 챙긴다. 다른 여배우는 어떨지 몰라도 문소리가 “집에서도 잘 안보던 거울을 이렇게 자주 보기는 처음”이다. 10월4일 오후 광화문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진행된 〈사과〉(감독 강이관, 제작 청어람)의 촬영현장. 상훈(김태우)과 ‘마지못해’ 첫 데이트를 하는 이곳에서 문소리가 연기하는 현정의 말 끝이 탁탁 끊어지며 가볍게 올라간다. 스테이크를 ‘경양식’이라고 표현하는 상훈 앞에서 킥킥거리며 “집, 서울 아니죠?” 얄밉게 묻는 폼새가 꿀릴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20대 후반 서울내기 직장 여성의 그것이다.
“영화 시작할 때 감독님의 유일한 주문이 ‘밝고 씩씩하게 해달라’는 거였어요. 쉽지 않네요. 대학 때만 해도 내 성격이 밝고 씩씩하다는 데 추호의 의심이 없었는데 영화를 하면서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인정하기 싫었던 부분을 직시하게 돼서 그런지…”
결혼뒤 나타난 첫사랑 이야기, 밝고 씩씩한 역할 쉽지 않네요〈사과〉를 찍으면서 그는 전보다 훨씬 자주 멈춰서고 망설인다. “전에 맡았던 역할보다 캐릭터가 많은 부분 비어 있는 상태에서 시작했어요. 또 미세한 감정의 변화를 작은 움직임 안에서 표현해야 하니까 굉장히 불안해요. 전에는 촬영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는 스스로 수고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잠자리 들어가서까지 내가 제대로 했는지 계속 되새기고 아쉬운 점이 떠오르고 그러네요.”
〈사과〉는 27살 직장 여성이 첫사랑에 실패하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 결혼에 이르고 다시 사랑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과정을 차분하게 그려간다. 제목은 먹는 사과와 ‘사과하다’는 두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설익은 연두색 사과처럼 푸릇푸릇한 첫사랑의 기억과 사랑하게 되면 자꾸 반복하게 되는 서로의 ‘미안한’ 상황들이 겹쳐진다. ‘밝고 씩씩하던’ 20대 현정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30대가 되면서 지금까지 해왔다고 믿어온 사랑의 빈 구석과 씁쓸함을 조금씩 깨달아간다.
촬영을 40% 정도 마친 지금까지는 여전히 ‘밝고 씩씩한’ 상태로 첫사랑 민석과의 닭살돋는 연애담이 본인 스스로도 문득 쑥스럽다고 한다. “촬영하다 말고 감독님께 제가 이렇게 하면 관객들이 적응 못한다고 말한 적도 있어요. 실제로 연애할 때 나는 더한데 말이죠.”(웃음) 영화에서 무책임하게 떠났던 민석은 현정이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뒤 갑자기 찾아와 다시 시작하자고 붙잡는다.
문소리 본인이라면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제 어렸을 때 별명이 칼이었어요. 절대로 뒤 돌아보는 성격이 아니었죠.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니까 인생 장담을 못하겠더라고요. 살다가 힘들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 싶어요.” 11월 말까지 촬영을 마무리할 〈사과〉는 내년 초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