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비포 선라이즈> 그 후, <비포 선셋> 뉴욕 시사기
2004-10-07
글 : 양지현 (뉴욕 통신원)

아름다운 인연은 계속된다1995년작 <비포 선라이즈>는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미국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필자에게 당시 나이도 비슷한 주인공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의 서투른 사랑 이야기는 낯설게만 느껴지던 외국 생활에 의지할 곳을 만들어주었다고 할까. 9년이란 세월이 지난 2004년 어느 날, <씨네21>의 뉴욕 통신원으로 속편 <비포 선셋>의 시사회와 기자회견에 참석한 뒤 지금까지 ‘나만의 영화’(?)라고 굳게 믿었던 <비포 선라이즈>를 사랑하는 팬들이 얼마나 많은지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상영이 끝난 뒤 관람객은 물론 기자들까지 모두가 영화팬이 돼 감독과 주연배우들을 기립박수로 맞아줬다. ‘제시’라고 불러도 되느냐고 물어보는 팬들이 종종 있다는 호크의 말이 충분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속편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줄리나 에단과 만날 때마다 속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고, 대화가 계속될수록 놓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주인공들이 다시 만나기로 했던 6개월 뒤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려고 했다. 그를 포함해 영화를 본 모든 사람들이 제시와 셀린느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바람은 호크가 다른 영화에 출연 중이어서 현실화되지 못했다. 호크는 링클레이터 감독의 이 설명에 “방금 한 말 밑에는 ‘에단이 나 엿먹였어’라는 자막이 필요하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감독과 두 배우의 세심한 시나리오 작업

△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는 각자의 장면을 쓰고 감독과 함께 협의하는 방법으로 <비포 선셋>의 시나리오 작업에 합류했다.

속편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생긴 것은 링클레이터 감독의 2001년작 <웨이킹 라이프>에 두 배우가 출연하면서부터. 이들은 2002년부터 영화의 대강을 함께 구상했고, 이메일과 팩스로 1년 이상 함께 작업했다. 델피의 말을 빌리자면 “서로 숙제처럼 써오기 시작했다”. 각자 장면을 맡아서 쓰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면 3명 모두가 만장일치를 해야 스크립에 넣을 수 있었다고 한다. 감독의 뜻대로 6개월 뒤에 찍지 못했으니, 제시나 셀린느 중 한명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가정해야 했다. 작가가 된 제시는 셀린느와의 하루를 소설로 쓰고, 홍보를 위해 파리에 들렀다가, 셀린느를 다시 만난 뒤 미국행 비행기가 떠나는 시간인 해지기 전까지 또 한번 그녀와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내용. 델피는 “그런데 나중에서야 내가 쓴 장면들을 내가 연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됐다”며 “왜 내가 연기할 장면을 이렇게 썼을까 하는 고민도 했다”며 웃었다.

이들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비포 선라이즈>를 함께 봤다. 놀랍게도 이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전편을 다시 보지 않았다고 한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줄리는 자기가 그때 너무 뚱뚱했다면서 투덜거리더라. 그 말이 재미있어서 영화에도 넣었다”고 했다.

<비포 선셋>을 본 사람이라면 중반부에 등장하는 파리 유람선 장면을 쉽게 잊지 못한다. 그때까지 의례적인 대화만 했던 두 캐릭터가 유람선에서 진짜 속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 링클레이터 감독은 “사실 유람선 보트는 관광객만 타기 때문에 줄리가 상당히 반대했다. 그래서 그 내용도 영화에 넣었다”며 델피가 싫어하긴 했지만 영화 속에서는 참 잘 표현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델피는 여기에 반박이라도 하듯이 “리처드는 에펠탑도 영화의 여러 장면에 넣으려고 했는데, 나의 강력한 반대로 간신히 막았다”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이 영화의 트릭은 대부분의 장면이 롱테이크로 돼 있기 때문에 어떤 장면도 필요없거나 잘라낸 것이 없다고 한다. 말하자면 연극 같다는 것. 링클레이터 감독은 “스크린에서 보는 그대로가 우리가 찍은 모든 것이다. DVD에 추가로 넣을 만한 것도 없다”며 웃었다.

한편 <비포 선셋>에서는 델피의 아름다운 노래도 감상할 수 있다. 지난해 8월 솔로 앨범을 발매했고, 이중 <월츠 포 나이트> 등 3곡이 영화에도 수록돼 있다.

흥행의 호조, 평단의 호응

<비포 선셋>은 미국 내에서 지난 7월2일에 개봉됐다. 비교적 짧은 1시간20분 길이의 이 작품은 9월20일 현재까지 미국 내에서 557만달러의 수익을 올렸으며, 최대 204개 극장에서 상영됐다. 95년 1월27일에 개봉됐던 <비포 선라이즈>는 최고 474개 극장에서 상영됐으며, 총 553만달러의 수익을 기록했다. <비포 선셋>이 여름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개봉 절정기에 절반 이하 숫자의 극장에서 상영됐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큰 선전을 펼쳤다고 볼 수 있다. 평론가들은 전편에 비해 더 깊이있는 캐릭터 묘사를 높게 평가했다. 미 전국 평론가들의 평론을 모아 수치로 평가하는 웹사이트 ‘라튼토마토스 닷컴’ (rottentomatoes.com)에 따르면 총 134개의 리뷰 중 127개가 호평을 해 95%라는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이번 작품의 개봉과 함께 화제가 되고 있는 실화도 있다. 지난 95년 <시카고 선타임스>의 평론가 로저 에버트의 칼럼에는 <비포 선라이즈>를 본 뒤 감동받은 대릴 엔필드라는 한 법대생이 실제로 기차에서 줄리 델피와 닮은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실렸다. 하지만 <애프터 선라이즈>로 표현된 그의 편지에는 연인과 함께 며칠을 보낸 뒤 새로 시작하는 대학에 이틀간 결석을 하게 되고, 솔직히 말하기가 부끄러워 아파서 결석을 했다고 말했지만 거짓이란 것이 발각돼 법대에서 퇴학을 받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이에 에버트는 엔필드의 연인 제시카와 함께 법대 교수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했지만 결국 거절당하고, 이후 엔필드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한 것. 당시 칼럼을 기억한 한 독자가 또다시 편지를 썼고, 에버트는 그뒤의 소식을 듣기 위해 신문과 인터넷 칼럼을 통해 엔필드를 찾고 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인터뷰

“끝을 생각해놓고 시작했다”

모든 영화는 만든 이의 일부를 담게 마련이라는 그는 <비포 선셋>은 세명이 같이 썼으니, 모두의 모습이 들어 있다며, “하지만 나 자신을 볼 때 셀린느의 캐릭터에 가장 가까운 것 같다”며 웃는다. 지난해 할리우드 코미디 <스쿨 오브 락>으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전혀 다른 사이즈의 필름을 할 수 있어서 만족스럽다는 그는 “하지만 사이즈와 상관없이 영화 만드는 건 어려운 것 같다”며 겸손함을 보인다. 에단 호크와는 다섯 작품을, 줄리 델피와는 세 작품을 함께한 그는 호크와 델피를 가족처럼 생각한다고 한다.

끝장면이 인상적인데.

처음부터 어디서 어떻게 끝날 것인지에 대한 골을 세워놓고 시작했다. 특히 줄리가 니나 시몬의 콘서트에 갔던 이야기를 해줄 때 이 장면을 끝으로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에단 호크의, 부인과의 이혼 스캔들 때문에 제시 캐릭터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에단의 캐릭터 제시는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한다. 하지만 스크립은 에단이 행복할 때 쓴 것이라서,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하게 보이기도 한다.

즉흥적인 연기가 있었는지.

100% 스크립이다. 즉흥연기 같다는 말을 들으면 칭찬이라고 본다. 자연스럽게 보인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대사보다는 이들이 말하지 않으면서 보여주는 다른 모든 것들이 더 흥미롭다.

에단 호크, 줄리 델피 인터뷰

“영화와 함께 성장한 것 같다”

제시는 실제 자신과 얼마나 닮았는지.

에단 호크: 제시는 1/3이 내 모습이고, 나머지 1/3은 리처드, 1/3은 줄리의 이상형 남자라고 보면 된다. (웃음) 제시와 셀린느는 같은 사람으로 남아 있다. 나이가 들긴 했지만.

왜 파리를 택했는가.

에단 호크: 장소는 어디든지 상관없다. 셀린느가 사는 곳을 남자가 방문한 거라지만 어디든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줄리 델피: 이 영화는 이 두 사람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호크: 하지만 파리는 셀린느의 연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파리에서 찍었는데, 얼마나 많이 촬영지를 제안했나.

줄리 델피: 내가 제안한 건 제시와 셀린느가 재회하는 ‘셰익스피어 서점’뿐이다. 나머지 장소는 나도 모르던 곳이다. 영화 덕분에 아름다운 곳을 많이 알게 됐다.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을 같이 하며 얻은 것이 있다면.

에단 호크: 영화와 함께 많이 성장한 것 같다. 특히 리처드와 줄리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한다. 배우로서 이런 영화를 만나기가 참 힘들다. 영화를 마친 다음 자신있게 ‘내 영화’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줄리 델피: 리처드와 에단과 일하면서 진짜로 ‘함께’ 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고,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글을 쓰다가 20살 때 그만뒀는데, 이 영화를 찍으면서 다시 쓰게 됐다.

앞으로의 계획은.

에단 호크: 줄리는 올 겨울에 영화를 감독할 계획인데, 기회가 되면 나도 함께 일하고 싶다.

줄리 델피: 누가 써준데. (웃음)

에단 호크: 나는 연기와 집필을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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