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라는 이름의 이 킬러는 좀 이상하다. 하룻밤에 다섯 건의 청부살인을 해치우는 프로이며, 더구나 누더기를 걸쳐도 귀티를 숨길 수 없는 톰 크루즈가 연기하는 킬러라면 누구보다 빛나는 액션영웅이라야 마땅한데,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그의 능숙한 솜씨를 거의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실수하거나 자신의 일을 불운한 택시 기사 맥스에게 떠맡긴다. 대신 말이 좀 많다. 영화 속의 킬러치고 그만한 다변가는 드물 것이다.
〈콜래트럴〉은 좀 이상한 액션영화다. 숨가빠야 할 액션장면은 종종 생략되거나 지체되며, 대화는 오래 지속된다. 미모의 여검사와 택시 기사 맥스의 첫 대화는 스릴러의 도입부로는 지나치게 길다. 빈센트가 뜬금없이 맥스의 어머니의 문병을 가서 주고받는 말들도 청부살인과 무관하다. 무엇보다 빈센트는 택시 안에서 맥스와의 대화를 멈추지 않는다.
오래 지속되는 건 대화만은 아니다. 〈콜래트럴〉은 야경의 스릴러다. LA의 밤을 밑그림으로 빚어낸 그 야경은 액션보다 오래 지속되며 눈부시게 푸르다. 카메라가 빌딩 숲 사이를 배회하거나 밤거리를 질주하거나 하늘로 날아오를 때, 스크린에 펼쳐지는 블루 톤의 파노라마는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음악과 몸을 섞으며 우울을 감염시킨다.
〈콜래트럴〉의 주인공은 멋진 킬러가 아니라 푸른 어둠이다. 빈센트는 그 어둠에 속한 악몽이다. 어둠이 내릴 때 찾아와서 어둠과 함께 시신이 되어 사라져간다. 밤새 몇 사람이 죽었고 곧 해가 뜰 것이다. 빈센트는 맥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르완다에선 하루에 3만 명이 죽어. 내가 여기서 몇 사람을 죽인들 당신이 왜 새삼스럽게 호들갑이야.” 해가 뜨면 세상은 어제처럼 돌아가고, 빈센트의 방문은 악몽으로 기억되겠지만, 그 악몽이 쉽게 지워지진 않을 것이다.
〈콜래트럴〉의 감독은 마이클 만이다. 그는 〈히트〉에서 그랬듯이 액션 스릴러의 얼개로 이야기를 짜놓고 그 주변에서 서성인다. 서성이며 풍경과 정서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명예율을 잃어가는 수컷의 속울음 같은 무겁고 처연한 풍경과 정서다. 마이클 만은 장르의 세계에서 작업하면서도 플롯의 독재를 거부하는 드문 감독이다. 그의 장르영화는 그래서 대개 남성 캐릭터 드라마로 나아간다.
마이클 만은 또한 지적으로 예민한 사람이다. 그는 수컷의 명예율을 원시적 공격성과 가부장적 권위로 오인하지 않는다. 그의 주인공들은 휴머니즘의 구호가 소음이 된 세상에서 자신의 육신을 지키는 것마저 실패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전작 〈알리〉의 무하마드 알리조차 그랬다.
육신의 보존에 실패하건 가까스로 성공하건 그의 영화는 그 불안의 심연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하마드 알리가 거둔 최종적 성공은 힘겨운 자기 방어일 뿐이었다. 〈콜래트럴〉의 킬러가 백인 남성의 우상 톰 크루즈이며 결국 그를 막아서는 택시 기사가 흑인이라는 건 정치적 올바름의 얄팍한 기술이 아니다. 장쾌한 액션을 원한다면 이 영화를 보지 않기를 권한다. 그러나 무력한 수컷으로서의 삶이 모멸스럽다면 이 영화와 함께 하룻밤을 맞기를 권한다. 다음날이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한 남자의 시신을 싣고 어둠 속으로 어둠과 함께 사라져가는 열차는 아무래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콜래트럴〉은 그런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