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왕가위를 다시 생각하며
2004-10-29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우리가 함께한 이 1분을 결코 잊지 않겠다.” <2046>을 보다가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장만옥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비정전>에서 장만옥은 장국영이 말한 그 1분 때문에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마 장만옥은 그 순간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 즉 ‘화양연화’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죽어가는 장국영은 그 1분을 기억하지 못한다(기억했다 해도 그에겐 그냥 장난이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생의 전부인 것이 상대방의 마음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다.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같은 시간, 같은 감정을 나눈대도 영원한 사랑을 보장받을 순 없다. 왕가위가 믿는 유일한 방법은 <화양연화>의 양조위처럼 앙코르와트의 돌벽에 구멍을 파고 그 안에 봉인하는 것이다.

<2046>은 <화양연화>의 후속편인 동시에 <아비정전>의 후속편이다. 차우는 <화양연화>의 장만옥을 잊지 못하는 인물인 동시에 <아비정전>의 바람둥이 장국영이며 양조위다(양조위의 등장에서 막을 내린 <아비정전>의 이상한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라). <2046>을 보면서 <화양연화>의 차우가 그리워지는 건 자연스럽다. <2046>의 차우는 <화양연화>의 차우처럼 순진한 남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함께 소설을 쓰는 대신 이 남자는 여자의 몸을 탐하고 화대를 지불한다. 사랑을 향한 문을 굳게 걸어 잠근 것이다. 난 <2046>이 <화양연화>만큼 좋진 않지만 몇몇 대목에서 그렇게 황폐해진 차우를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아팠다. <비포 선셋>의 대사처럼 수리첸과의 사랑에 “모든 로맨티시즘을 쏟아부어,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널리 인정하듯 왕가위는 멜로드라마의 거장이다. 그의 영화는 하나같이 절절한 러브스토리였고 번번이 새로운 유행을 창조했다. 그런데 <2046>에 관한 인터뷰를 보다가 왕가위는 이번 영화를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말한 대목이 눈에 띄었다. 러브스토리와 사랑에 관한 영화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왕가위는 한번도 사랑이 결실을 맺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양조위와 왕정문이 마침내 다시 만나는 <중경삼림>조차 따지고보면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그는 사랑이 비껴가거나 서로 상대방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화들을 찍었다. 난 왕가위가 사랑의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영화에서 사랑은 언제나 손에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지만 손을 내밀 때마다 뒤로 물러선다. 왕가위는 그 이유가 비극적 운명 때문이라는 식으로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 왕가위의 시공간은 사랑의 밀도 높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 안에서 이뤄지는 실제 행위는 연인들의 달콤한 속삭임이 아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상대방이 없는 빈 방을 청소하거나 타인을 흉내 내는 일로 감정을 표현한다. 반대로 왕가위 영화의 시공간이 황홀한 이유는 그것이 빗나간 사랑, 잃어버린 사랑, 좌절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뿐 아니라 다른 영화들도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사랑의 불가능함에 관한 영화로 찍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왕가위는 거꾸로 생각한다. 그는 사랑을 그리지만 그 방식은 사랑의 불가능함을 통해서다. 달리 말하면 그는 사랑의 불가능함을 깊이 고민했기에 독보적인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어쩌면 왕가위에게 영화는 앙코르와트의 돌벽처럼 불가능한 사랑을 봉인하는 구멍이 아닐까. 그리하여 왕가위 영화가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는 사랑의 승리와 환희를 다루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화는 무언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 때문에 감동을 준다. 아무리 왕가위식 촬영과 조명을 모방해도 왕가위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2046>에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스타일리스트 왕가위의 한계’라고 단정짓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난 왕가위의 다음 영화가 다시 4년 뒤에나 나올까봐 여전히 조바심이 난다.

PS. 며칠 전 <씨네21> 전 편집장 조선희 선배가 전화를 했다. 지난주 ‘편집장이 독자에게’에 틀린 것이 있다는 지적이었다. <씨네21>과 부산국제영화제가 동갑내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듣고나서 생각해보니 부산국제영화제는 1996년 1회를 시작해 9회를 맞았고, <씨네21>은 1995년 창간해 9주년을 맞았다. 같은 아홉살이라도 1년 이상 차이가 난다. 틀린 정보를 내보낸 점, 무척 창피하다. 독자 여러분, 죄송합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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