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가면 쓴 함지기라도 맞아들인 것일까. 10월18일 저녁, 서울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 퇴근 행렬이 끝나고 인적이 드문데 유독 한집만 요란하고 북적댄다. 전날 놀이터 촬영 때 시끄럽게 해서 아파트 일부 주민들로부터 항의를 들었던 <사과> 제작진은 되도록 큰소리 내지 않으려고 하나 촬영 준비로 인한 소음을 막을 방도는 없다. 56평 대형 아파트라고 하지만 그 안에는 45명의 스탭들과 여기에 더해 10여명의 취재진까지 가세했으니 그럴 수밖에. 소음뿐 아니라 신발까지 복도 계단에 흘러 넘친다. 그 앞을 지나는 주민들 중엔 결혼 앞두고 잔치라도 여나 수군대는 이들도 있다.
이들의 추측이 전혀 터무니없는 건 아니다. 이날 <사과> 제작진이 찍어야 할 장면은 극중 상훈(김태우)이 현정(문소리)의 집에 방문해 예비장인과 장모에게 인사드리면서 대화를 주고받는 것. “형제는 어떻게 되나?”“3남2녀 중 제가 장남입니다.” 상훈의 방문으로 부산해진 현정의 집을 핸드헬드로 잡아야 하기 때문에 강이관 감독은 손수범 촬영감독과 함께 인물들의 동선을 체크하면서 동시에 배우들과의 리허설을 진행하느라 정신이 없다. 꼼꼼하기로 소문난 김태우는 남의 집에 온 객(客)이니 어색함이 컨셉이라며 간단한 손동작까지 따져 묻고, 농담을 입에 담는 여유를 보이는 문소리도 테스트가 한 차례 끝나면 좀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대사를 만들어 감독에게 제안한다. 슛에 들어가기에 앞서 배우들과 머리를 맞댔던 강 감독은 뒤편에 마련된 흡연실에서 담배 한대를 물지만, 그것도 잠깐. 앵글을 고민해보자는 촬영감독의 호출에 한대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나간다.
현재 50%의 촬영을 마치고 춘천으로 로케이션을 떠난 <사과>는 20대에 “사랑은 서로 다른 둘이 하나가 되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현정이 실연, 결혼, 임신 등을 거치면서 겪게 되는 변화를 따르는 영화. 제목인 사과는 힌트다. 사과의 두 가지 뜻처럼, 풋풋한 과일 같은 사랑이 어떻게 해서 상대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되는 감정과 관계들로 바뀌는지를 디테일하게 묘사할 것이라고. “매일 술 먹으면 연애 이야기 하지 않나. 서로 코치해주고 열심히들 하는데 사랑이 뭔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정답을 쉽게 찾지 못한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이 영화에 충실히 담아보고 싶다”는 강이관 감독은 “여성의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가는 영화라 문소리로부터 대사나 설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덧붙인다. 내년 1월 개봉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