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빈 집> 영화음악 담당사 슬비안
2004-11-04
글 : 오정연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영화음악은 화면 속에 묻어가는 거죠”

영화음악회사 ‘슬비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사방에 위치한 세개의 방에서 세 남자가 걸어나온다. 대표 이승우(28)씨, 음악감독 이용범(31)씨, 사운드 감독 김우근(28)씨. 버클리 음악대학 동문인 이들은, 슬비안의 구성원 전부다. “명목상 직책을 나누긴 했는데, 영화음악 작업에 들어가면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해가는 공동작업을 지향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건 아니”라고 설명하는 이들이 그룹이나 팀이 아니라, 굳이 회사라는 딱딱한 형식으로 모인 이유는 사뭇 명확하다. “한국영화는 분명히 발전을 할 것이고, 영화음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영화음악에도 시스템이라는 것이 필요해질 거고. 그 시스템을 앞장서서 만들고 싶었다.” 회사이름 ‘슬비안-거문고 슬(瑟) 날 비(飛) 기러기 안(雁)’(목적지를 향해 편대를 이루어 날아가는 기러기)이 뜻하는 바가 비로소 명확해진다.

<신부수업>을 통해 장편영화에 데뷔한 슬비안은, 이제 막 <빈 집>으로 두 번째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신부수업>의 음악이 뮤지컬 장면에 흐르는 노래 <여자를 내려주세요>를 통해 단번에 떠오르는 반면, <빈 집>의 음악은 아무리 애를 써도 멜로디가 생각나지 않는다. 심지어 음악이 있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할 지경. 기자의 솔직한 고백에 “그렇죠? 그게 의도였어요”라는 멋쩍은 대답이 이어진다. 대사도 없고, 심지어 화면 속 주변음도 거의 부재하는, 난감한 영화 <빈 집>의 음악에 대한 김기덕 감독이 주문은 다음과 같았다. “화면을 방해하지 않는 음악. 멜로디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여백이 많은 음악”. 가장 큰 문제는 이 영화에 부재하는 소리 그 자체였다. “원래 영화음악은 화면 속의 다른 소리에 묻어가야 하는데, 영화에 아예 소리란 게 없으니까요.” 그래서 완성된 <빈 집>의 음악은 색으로 표현하자면, 영화의 부족한 주변음을 채워주면서도 공기처럼 녹아든 무채색과도 같다.

애초 마이클 니먼이 음악을 하게 될 것이라고 이미 소문이 날 만큼 난 상황에서, 그들은 뒤늦게 <빈 집>에 합류했다. 관객이 기억도 못하는 음악을 만들어야 했지만, 이 역시 그리 서운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시작하는 우리가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라면서, “감독이 요구하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 영화음악가의 첫 번째 조건. 그게 싫으면 직접 음악을 만들면 된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잘 나가는 할리우드의 음악감독 밑에서 수학한 입장에서 한국 영화계의 음악을 비롯한 각종 후반작업 공정 자체가 불만일 법도 한데, 집요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불만은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부족한 시간이 늘 아쉽긴 하지만, 그건 후반작업 하는 분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그런 것들이 너무 억울해서 할리우드 영화음악 하는 선생님께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거기도 그런가요?’라고. 근데 ‘여기도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오더라. (웃음) 그래서 그때부터는 겸손해지기로 했다.”

그 겸손보다도 믿음직스러운 것은, 같은 화면이라도 음악에 따라 정서가 천차만별로 달라지게 만드는 영화음악의 힘을 믿는 그들의 낙관적인 자세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음악이 처음으로 대형 극장의 ‘빠방한’ 스피커로 전달되는 순간의 감동을 분명히 기억한다. 슬비안의 힘찬 날개짓이 이제부터, 라고 믿을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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