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그 얘기를 팔아 소설가가 되다니! 공공의 안녕을 저해하지 않는 한, 남의 직업세계에 대해 간섭하는 건 지나치게 오지랖 넓은 일이다. 그러나 어떤 직업에도 직업윤리라는 게 있다. 애초부터 ‘100% 논픽션 실화 소설’ 따위의 알쏭달쏭한 타이틀을 붙이고 장사 시작한 게 아니라면, 자기가 겪은 체험을 날것 그대로 가져다 소설이라고 발표하는 행위는 명백한 직업윤리 위반에 해당한다.
물론 자기 경험을 소설의 모티브나 근간으로 삼을 수는 있겠지만, 누가 뭐래도 소설은 ‘구라’ 와 ‘뻥’의 세계다. 물론 그쪽으로 잘 안되는 이들이 가끔 해묵은 일기장을 이용하기도 한다는 것,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사건 당사자가 봐도 긴가민가하도록, 뺄 건 빼고 바꿀 건 바꾸는 건 기본 예의라고 본다. 생각해보라. 어느 날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들춰본 소설책속에 십여 년 전 내 얘기가 고스란히 들어있다면 얼마나 황망하겠는가. 더구나 ‘헤어진 옛 연인’ 혹은 ‘하룻밤 풋사랑’의 이름이 작가랍시고 버젓이 인쇄되어 있다면? 셀린느가 쿨한 프랑스 여자였기에 망정이지, 웬만한 한국 여자 같았으면 진즉 머리 싸매고 들어 누웠거나 명예훼손 소송을 심각하게 고려중일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소설가라는 신분을 밝히는 즉시 “혹시 제 얘기 쓰시는 건 아니겠죠?” 라는 경계의 시선이 쏟아지는데. 가뜩이나 어려운 동업자들의 사회생활을 더욱더 제한하다니. 아아, 그 남자, 너무했다.
둘째, 그 레퍼토리 심하게 전형적이잖아? “나 요즘 정말 불행하거든. 부부관계도 거의 안 하거든. 밤마다 네 꿈꾸거든. 한번도 널 잊은 적 없거든.” 십 년 만에 만난 옛사랑이 이렇게 나온다면, 미안하지만 기쁘기는커녕 진심으로 속상해질 것 같다. 이를테면 그건 옛사랑에 대한 ‘예의’의 문제다.
세상엔 수 천 가지 종류의 ‘작업용 멘트’가 존재한다. 여자를 유혹하기 위한 입담으로 따지자면, 2004년 파리의 제시보다 1995년 비엔나의 제시 쪽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월등히 낫다. 스물세 살의 그는 적어도 이렇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직접화법의 문장들을 늘어놓는 청년은 아니었다. 지금 그 발언의 진위여부를 의심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현재 그의 생활은 행복하지 않으며, 셀린느라는 여자를 오랜 세월 가슴에 품고 살아왔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그걸 그 여자 면전에 대고 말로 옮겨놓는 순간, 그 진정성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둘의 애틋한 재회는 갑자기 세속의 차원으로 미끄러진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냐고 묻는다면, 할 말 없다). 때론 입 속으로 꿀꺽 삼키는 게 더 나은 진심도 있다는 것을, 제시는 제 한 몸 바쳐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P.S.: 그런데, 어라? 이 모든 ‘밥맛없는 캐릭터의 난관’에 굴하지 않고 그 남자 제시, 그 여자 셀린느와 통(通)하였으니, 남녀상열지사의 세계는 과연 복잡하고 또 오묘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