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에 붙은 장국영, 주윤발 스티커, 하드보드지에 스타들 사진을 붙여 만든 필통이며 책받침과 쇼핑백이 시대배경인 1991년을 설명한다. 10년 저편 세월이다보니 인터넷에서 어렵게 모은 조잡한 이미지를 확대하거나, 헌 책방에서 구한 잡지 사진을 스캔한 것들이다.
파란색 줄무늬 스커트, 같은 디자인의 넥타이, 눈이 부신 흰 블라우스, 노란색 조끼 차림의 여고생 36명을 보는 순간 꽃들이 무더기로 핀 화단 앞에 선 듯 몽롱해졌다. 졸거나 낙서를 하거나 재잘거리고 있는 이들의 생물 공책을 펼치니 대뜸 들어오는 필기 내용은 남성생식기에 관한 것이다.
1. 남성생식기의 구조와 기능: 내부 생식기 고환의 크기- 보통 메추리알 정도. 좌우의 크기가 다르다. 왼쪽 고환은 오른쪽보다 낮게 달려 있다.
빛살 속에 드러낸 소녀들의 성이라니. <몽정기2>(감독 정초신) 촬영현장인 양수리 종합촬영소의 스테이지1 실내는 대낮보다 더 환했다.
왁자지껄하던 은강여자고등학교 2학년3반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파마머리의 교생 강봉구(이지훈)가 첫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아직 초경도 못했다는 발육부진의 성은(강은비)도, 늘 탐구하는 자세로 성 지식 습득에 앞장서는 수연(전혜빈)도, 순진한 척 내숭 떨기에 바쁜 미숙(박슬기)도, 혼자 웃자라서 대학생 같은 성숙함을 풍기는 세미(신주아)도 두눈을 온통 봉구를 향해 쏟고 있다. ‘엄마가 보고 있다!’는 급훈이 무색하다. 이 문제적 소녀들은 앞으로 교생을 상대로, 그리고 경쟁적으로! 성을 실습하게 될 것이다. 교실 뒤편 모니터 앞에서 자리를 한 정초신 감독은 연방 시원하게 ‘액션 컷 오케이’를 외친다. 모니터를 보러 온 봉구가 머쓱하게 ‘너무 빠다스러운데’라고 머리를 긁적여도 멋있다면서 기운을 북돋운다. “지금 모니터 앞에 있는 여자들 (좋아서) 쓰러지고 있다. 응급차 불러라.”
영화 촬영현장 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예정대로 진행되는 촬영장. 제멋대로인 치마 길이만큼이나 제각각인 여고생의 발랄함과 정 감독의 너스레로 지루할 틈이 없다. 두 장면만이 유일하게 사람들을 침묵시켰다. 세미가 체육과 교생 봉구를 향해 미소를 날리며 살짝 오른쪽 가슴을 보여주는 장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멈췄다.
저녁 식사 전의 마지막 장면은 이지훈이 노래를 부르는 대목이다. 예나 이제나 잿밥에만 관심있는 학생들은 교생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조른다. 록그룹 부활의 <희야>를 아마 처음 들어봤을 여고생 보조출연자들은 <희야>의 몇 소절이 끝나자마자, 촬영이 빨리 끝나서 좋다는 건지 노래가 좋다는 건지 ‘죽여!’를 합창한다.
<몽정기>의 흥행신화에 취해 있다가 <남남북녀>로 찬물 세례를 받은 정초신 감독. “여고생들이 어찌나 시끄러운지”라면서도 싱글벙글이다. 강제규&명필름으로 두 영화사가 한집 살림을 한 뒤의 첫 작품인 <몽정기2>의 제작비는 24억원. 빨리 찍는 자신의 스타일이 “부실공사가 아니라 저예산 공사”라고 주장하는 정 감독의 촬영도 11월21일이면 부천과 잠원 일대를 돌고 끝난다. 내년 1월 개봉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