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달콤한 조각케이크같은 일상의 판타지, <하나와 앨리스>
2004-11-16
글 : 문석
피로할 때 먹는 달콤한 조각케이크 같은 ‘이와이 월드’의 결정체.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소녀 하나(스즈키 안)는 어느 날 전철역에서 만나 짝사랑하게 된 학교 선배 미야모토(가쿠 도모히로)를 미행하다 그가 섀시문에 머리를 부딪혀 기절하는 것을 목격한다. 얼마 뒤 깨어난 미야모토에게 하나는 깜찍한 거짓말을 한다. “선배, 기억 안 나요? 선배가 나 좋아한다고 고백했잖아요”라고. 하나는 미야모토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과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며 윽박지르고, 단짝친구 앨리스(아오이 유우)까지 이 귀여운 사기극에 동참시켜 사랑을 이어나가려 하지만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도대체 이와이 순지 안에는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살고 있는 걸까. 한 남자아이와의 연애를 통해 한뼘씩 자라나는 두 10대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하나와 앨리스>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 궁금증이 치오른다. 시종 조잘대고 까르르 웃음을 쏟아내며 서로에 의지해 뒤엉키는 소녀들의 겉모습을 잘 보여준다는 점만이 아니다. <러브레터>와 <4월 이야기> 등을 통해 여성의 내밀한 속내를 정교하게 보여준 이와이 순지 감독은 이제 막 사랑과 우정이라는 감정을 마음속 서랍 안에서 정리하기 시작한 소녀들의 내면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가슴 벅찬 설렘, 솟아나는 질투심, 한없는 야속함 등 첫사랑을 맞은 소녀들의 미세한 감정의 흐름이 눈부신 햇살과 쏟아지는 벚꽃 이파리, 연녹색 나뭇잎과 함께 정밀하게 묘사될 때, 보는 이의 마음 또한 소녀적 감수성으로 충만해지며 이 짧은 청춘의 순간은 영원으로 지속되는 듯하다.

그렇다고 이와이의 소녀들이 꼭 ‘소녀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혼한 엄마와 함께 사는 앨리스는 엄마에게 “연애는 결혼을 생각하면서 해”라고 충고할 줄도 알고, 미야모토에 대한 감정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뒤섞여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발 슬쩍 물러날 줄도 안다. 당연 15살 소녀답게 “철학이요? 그게 뭔데요? 그런 것 없는데…”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앨리스지만 종이컵과 비닐 테이프로 발레 토슈즈를 만들어 오디션에 임할 정도로 당찬 구석도 있다. 하나 또한 미야모토에게 이별을 고하며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고, 사랑의 아픔 속에서도 만담 공연 연습에 열중하는 씩씩한 아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와 앨리스>는 이름만 같은 낯선 이로부터의 편지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러브레터>나 꼬마 아이들의 삼각관계를 그린 <불꽃놀이 아래서 볼까, 옆에서 볼까>보다는 전작인 <릴리 슈슈의 모든 것>를 떠올리게 한다. 언뜻 보기에 이 영화는 이지메를 소재로 한 음울한 분위기의 <릴리 슈슈…>와는 완전히 다른 쪽에 서 있지만, 씩씩하게 성장하는 아이들을 눈물나도록 아름답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늘 새로운 영화를 추구한다”는 이와이 순지의 영화관처럼 <하나와 앨리스>는 그의 전작들과 또 다른 차별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임에 틀림없지만, ‘이와이 월드’의 모든 것을 담은 영화이기도 하다. 순정만화처럼 뽀송뽀송한 인물들과 대사, 감각적이고 환상적인 영상, 그리고 가슴저리는 사랑의 순간 등이 치밀한 조직을 이룬다. 특히 <러브레터>에서 그랬듯, 이 영화의 리듬감은 완벽에 가깝다. 계절이 변화할 때 영화는 외경을 비추고 호흡은 느려진다. 다시 인물들로 돌아오면 템포는 10대 아이의 박동처럼 빨라진다. 여기에 이와이 순지 자신이 만들어낸 현과 피아노의 심플한 음악이 가미돼 리듬감은 더 강화된다. 이와이 감독의 영화가 언제나 그랬듯 이 영화 또한 일상의 판타지를 선사한다. “넌 기억상실증에 걸렸어”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믿어버릴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 자그마한 비현실성은 아름다운 동화가 그렇듯, 감성 풍부한 세계를 창조하게 해준다. 일본어로 꽃을 의미하는 하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온 앨리스(일본어로는 ‘아리스’, 원래 이름은 아리스가와 데쓰코), <파이널 판타지>를 개발한 스퀘어 소프트의 창립자의 이름과 같은 미야모토 마사시 같은 캐릭터들의 이름이나 교실 바깥에서 아톰 인형이 둥실거리는 장면 등도 이 반짝이는 ‘감성적 코미디’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들.

어떤 이들에게 <하나와 앨리스>는 너무 ‘과잉’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시종 소녀들을 비추는 햇살이나 그녀들의 움직임을 쫓아다니며 흔들리는 디지털 영상, 소녀들의 앙증맞은 행동 등을 느끼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 또한 후반부 오디션장에서 앨리스가 펼치는 발레 공연 장면만큼은 외면할 수 없을 것. 5분도 넘는 이 장면을 보노라면 ‘너무 아름다워 슬퍼진다’는 세계가 이해된다. 이 영화는 2003년 일본 네슬레의 초코바 ‘킷 캣’ 발매 30주년을 기념하는 인터넷용 3부작 단편영화에서 출발했는데, 애초 단편에서는 하나가 중심인물이었으나 장편으로 옮겨지면서 두 소녀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 <하나와 앨리스>의 배우들

사랑스러운 소녀들과 화려한 카메오

하나 역의 스즈키 안(17)은 1996년 TV드라마로 데뷔한 ‘중고참’급 10대 연기자. 10살 때 <삼나무에 내리는 눈>에 출연했고, 포카리스웨트의 CF 모델로 나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쥬브나일> <포켓 몬스터> <리터너> <문차일드> 등에 출연했으며, 1997년 한 잡지의 드라마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일본에서 가장 기대를 모으는 신인 중 하나다. 전지현, 손예진, 신민아를 뒤섞은 듯한 앨리스 역의 아오이 유우(19)는 데뷔는 늦었지만 일본에서 급부상하는 소녀 연기자다. 1999년 1만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뮤지컬 <애니>의 폴리 역을 맡으며 데뷔한 아오이는 2001년 이와이 순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원조교제를 하는 여중생으로 나오며 영화계에 발을 내딛었다. 시오타 아키히코 감독의 <해충>(2002)을 통해 본격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그는 이후 <철인28호> <우연히도 최악의 소년> 등에 나왔다. <하나와 앨리스>에서는 두살 때부터 배운 발레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미야모토 역의 기쿠 도모히로(20)는 <주온2> 등에 출연했으며 <릴리 슈슈…>에서 폭력서클의 말단 비행 청소년으로 나오면서 이와이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하나와 앨리스>에는 예기치 않았던 카메오들도 대거 등장한다. <비밀> <연애사진> 등에 나왔고 옴니버스영화 <잼 필름스>에서 이와이 감독의 연출편에 등장했던 히로스에 료코는 후반부 아오이를 오디션하는 장면에서 잡지 관계자로 나오며, <사무라이 픽션>의 감독 나카노 히로유키는 앨리스에게 철학을 물어보는 오디션 책임자로 등장하고, 기타노 다케시의 <그 남자 흉포하다>나 <뱀 이치고> 등에 출연한 히라이즈미 세이는 무심한 듯 보이지만 속깊은 앨리스의 아버지로 나타난다. 후반부 오디션에서 사진작가로 나오는 오사와 다카오, 앨리스의 엄마 역의 아이다 쇼코, 앨리스 엄마의 남자친구 역의 아베 히로시, 발레 선생님 기무라 다에 등은 모두 인정받는 중견 배우들로, 제작 당시 일본에서 ‘화려한 카메오’로 큰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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