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안에도 소녀가 있다”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과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 일본에서만 2340만명의 관객 동원, 일본영화 역대흥행 1위 기록. 3년 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거둔 성적이다. 그러므로 관객과 평단의 한결같은 사랑을 받아온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더이상 ‘목표’라는 뻔한 단어는 무의미하다. 평생 물질문명을 경계하고 자연친화의 메시지를 전달했던 그에게 그런 객관적인 수치는 어울리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신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11월20일, 일본 개봉을 앞두고 있다. 제작사 지브리는 6개월 전부터 대대적인 마케팅을 펼쳤던 <센과 치히로…>와 달리, 개봉 한달 전까지 베니스영화제와 도쿄영화제 상영을 제외하고는 몇장의 스틸만 공개할 정도로 비밀 마케팅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베니스영화제 기술공헌상 수상과 기무라 다쿠야 등 유명인들의 목소리 출연, 효과적인 마케팅으로 관객의 인지도는 전작보다 높다고. 미국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3D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이 비슷한 시기 전국 700여개관 배급을 목표로 하고 있는 시점, 애초 200개관 개봉을 목표로 했던 <하울의…>의 배급사 도호는 700개까지 개봉관을 늘려잡았지만 지브리는 오히려 400개 정도로, 작지만 오래가는 배급 전략을 꾀하고 있다. 3D애니메이션의 거센 도전 속에서도 아날로그를 고수하는 지브리의 묵직한 자신감, 좀더 많은 관객에게 오랫동안 즐거움을 선사하고 싶은 미야자키의 바람이 느껴진다.
미야자키의 작은 변화 - 로맨스 강조
11월8일. <하울의…>의 배급사 도호에서는 한국 기자들을 대상으로 소규모 시사가 진행됐다. <센과 치히로…>가 가장 일본적인 비전과 이야기를 통해 전세계를 매혹시켰던 것을 생각할 때, 영국의 동명 판타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 그리고 일관된 작품세계가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가 하는 점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도입부, 짙은 안개 속에서 정체불명의 물체가 움직인다. 곧이어 그것은 거대한 고철덩어리 성(城)임이 밝혀진다. 일반적으로 ‘움직이는 성’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가냘픈 네개의 다리, 연기를 내뿜는 굴뚝, 심지어 눈과 입까지 가진 성을 맞닥뜨리는 순간 관객은 미야자키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하울의…>은 기계문명과 마법이 공존하는 시대, 마녀의 저주로 인해 하루아침에 90살 노파로 변하게 된 17살 소녀 소피와 움직이는 성의 주인으로 비밀스런 이중생활을 누리고 있는 또 다른 마법사 하울의 기묘한 동거를 다룬다. 따뜻하고도 강인한 내면을 가진 소피는 철부지요 막무가내인 하울을 길들이고, 결국 소피와 하울은 세계를 구원한다. 언제보아도 꿈결같은 비행(飛行)의 순간에는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암울한 전쟁의 분위기가 영화 전반을 지배하면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도 익숙한 부분. 그러니까 이것은 분명, 친근하게 변주되는 미야자키만의 세계다.
한편 미야자키의 오랜 팬들에게는 일단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를 강화했다는 점, 심지어 그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키스신(!)이 등장한다는 점이 나름의 변화로 다가올 것이다. 하울은 관계자들이 만장일치로 꼽는 ‘미야자키의 남자주인공 중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 그 목소리는 일본 최고의 스타 기무라 다쿠야가 연기했다. 유명배우 캐스팅을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할리우드의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작품 그 자체만으로 승부해온 지브리는, 현재 이 사실을 전면에 내세우려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소년과 어른의 경계, 나약함을 감추는 제멋대로의 성격을 가진 하울의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기무라의 캐스팅이 영화의 성공에 커다란 기여를 할 것은 분명하다. 또 다른 중요 캐릭터를 연기한 유명배우들도 간과할 수 없다. 소녀에서 노파까지 폭넓은 나이, 사랑을 느낄 때는 젊어졌다가도 기분이 울적해지면 다시 노파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미묘한 변화를 사실적으로 소화한 소피 역의 바이쇼 치에코는 <남자는 괴로워>로 유명한 일본의 원로배우. <모노노케 히메>에서 들개 모로의 매력적인 목소리를 연기했던 유명한 여장(女裝) 연극배우 미와 아키히로는 자신과 똑같은 외모로 표현된 황무지 마녀를 연기했다. 하울의 견습생 마이클과 말썽쟁이 불꽃 마귀 캘시퍼, 속을 짐작할 수 없는 노견(老犬) 힌, 마지막 순간까지 소피에게 입은 은혜를 갚는 허수아비까지 각자의 사연과 매력을 가진 주변 캐릭터들도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성 안의 공간들을 재현한 전시회도 열려
시사 다음날인 11월9일. 성 안의 중요한 공간들을 재현한 전시회가 열리는 <니혼TV> 프라자 1층을 찾았다. 애니메이션 개봉과 때를 맞추어 전시를 기획하는 풍토가 일반적인 일본에서도, 이 전시회는 그 규모 면에서 눈에 띄는 사전행사. 전시장 내 입장은 무료이고 사진촬영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이들이 마음대로 만져보고 뛰어다닐 수 있도록 안전하고 견고한 재질로 제작된 전시품들, 쾌적한 관람을 위해 관람객을 100명 이하로 철저히 제한하는 규정 등은 좀더 많은 관객의 눈높이를 최대한 배려하는 세심함을 반영한다. 아이의 손에 이끌려 전시장을 둘러보는 젊은 엄마부터 또래 친구들과 함께 디카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중고생들, 신기하다는 듯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노부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람객을 만날 수 있었다. 전시장 밖으로는 평일 오전 시간임에도 줄이 늘어섰다. 전시회 개장일인 11월3일을 기해 대대적인 광고를 펼친 <니혼TV>의 적극적인 홍보, 전시장이 자리한 시오도메가 평소 관광객과 쇼핑객의 이동이 잦은 장소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러한 관심은 미야자키에 대한 일반인들의 변함없는 애정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 11월3일부터 28일까지 열리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전시회장 외부 마당. 커다란 무대에 하울의 성, 허수아비, 소피의 모형이 자리하고 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마당 곳곳은 사진을 찍는 관람객으로 붐볐다(맨 위). 전시회장에는 성 안의 주요 장면을 정교하게 재현해놓았다. 식사를 준비하는 소피 뒤로, 귀여운 노파로 돌아온 황무지 마녀의 모습이 눈에 띈다(위).
<하울의…>은 원래 올해 여름 개봉을 목표로 진행 중인 프로젝트였다. 미야자키가 지브리의 후진양성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던 이 작품의 연출을 맡을 것임을 선언하고, 러닝타임이 길어지면서 결국 11월까지 개봉이 미뤄졌다. <모노노케 히메> 때부터 ‘이것이 미야자키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그는, 이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음을 깨달았다고. 그런 의미에서 미야자키가 90세 할머니가 주인공이라는 원작의 설정에 매료됐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소피는 영화 속에서 “나이가 들어 좋은 점도 있다”는 걸 계속해서 강조한다. 17살의 소녀라면 감당하지 못했을 억척스러운 일들을 소화하고, 젊음의 혈기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넉넉한 품을 보여주는 소피는 영화 속에서 진정한 성장을 경험한다. 웬만해선 마케팅에 관여하지 않는 미야자키가 직접 작성한 카피는 다음과 같다고. ‘할머니 안에도 소녀가 있다.’ 63살의 거장은 나이듦으로 가능한 마음의 여유, 그리고 그 안에도 설레는 감정과 눈부신 성장의 계기가 있을 수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미야자키의 익숙한 변주 속에서 반짝이는 사려깊은 변화의 조짐이며, 이는 오랜 시간을 함께한 관객에게 건네는 감독의 소중한 선물이다.
프로듀서 스즈키 도시오 인터뷰
“할머니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영화화하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무엇인가.
5년 전, 미야자키가 그 책을 보여주면서 “성이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어린 소녀가 갑자기 90대 할머니가 된다는 설정”에 대해 흥미롭게 이야기했다. 그는 할머니가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 그동안 없었다면서, 자신이 60살이 넘은 감독이기에 노인들의 기분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 소설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반대는 없었나.
사소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자면, 미야자키가 스튜디오의 젊은 인재들과 기획회의를 하던 중, “소설이라면 70살 할머니가 주인공이어도 상관없지만, 영화는 그럴 수 없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랬더니 누군가는 “주인공이 항상 젊은 여자일 필요는 없다”고 말하기도 하더라. (웃음)
영화에서 묘사된 유럽의 풍경은 무엇에 중점을 둔 것이었나. 특별한 모델은 없었나.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일본인이 보는 서양의 모습이다. 일본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점부터 일본인들에게 서양은 꿈과 동경의 대상이었고, 60대 이상의 일본인들에게는 아직도 그런 게 남아 있다. 미야자키는 자신이 좋아하는 서양을 그린 것이고 그것은 실제와는 다르다. 이건 여담인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때도 특별히 모델이 되는 장소는 없었다. 그런데 미야자키와 내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숙소 부근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근데 그 영화 속 배경과 똑같은 골목을 발견하고 정말 즐거워한 적이 있었다(추가질문 결과 그곳은 장충동 족발집 골목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후진양성 프로그램으로 진행 중인 것은.
후진양성이란 건 어려운 일이다. 요즘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어하는 젊은 사람들은 많은데 잘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이가 든 사람이라고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마도 미야자키는 죽을 때까지 애니메이션을 만들려고 할 것 같다.
배우들 무대인사
“사람의 마음은 디지털이 아니잖아요”
11월8일 오후 7시30분. 유락초 스카라좌 극장에서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VIP 시사가 열렸다. 영화 상영 직전 소피(바이쇼 치에코), 하울(기무라 다쿠야), 황무지 마녀(미와 아키히로)를 연기한 성우들의 무대인사가 있었고, 이것은 그들이 영화와 관련하여 무대에 서는 유일한 자리였다. <니혼TV> 아나운서 후쿠자와 아키라의 사회로 일종의 토크쇼처럼 진행된 무대인사. 저마다의 위치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들은, 영화와 상대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대화는 예정된 시간 30분을 넘겨 진행됐다.
소피 l 바이쇼 치에코
진심을 담아 만들었다. 소녀와 90살 역할을 한꺼번에 소화하는 것 때문에 많이 고민스러웠다. 감독님께서는 그냥 “일부러 목소리를 변화시키지 말고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할 것”을 주문했다. 같은 주인공임에도 기무라와 마주칠 기회가 없어서 스탭들에게 일정을 맞춰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웃음) 그날은 일부러 일찍 나갔는데, 너무 긴장했는지 그를 처음 보고 장난스럽게 “아잉~”이라고 말해버려서 정말 당황스러웠다. (일동 웃음) 내가 부른 영화의 주제곡 <세계의 약속>은 거의 10년 만에 부른 노래였다. 하지만 결과를 듣고나서는 내가 뭔가 굉장한 일을 한 것 같아서 뿌듯했다.
아내와 아이가 미야자키 감독님의 열렬한 팬이다. 아무 역할이나 맡겨달라고 먼저 얘기를 꺼냈는데, 막상 내가 맡게 될 역할이 주인공, 그것도 이처럼 잘생긴 인물임을 알고 너무 놀랐다. (웃음) 바이쇼는 정말 대단하다. 작업 중에는 그가 정말 소피처럼 느껴졌으니까. 문득 옆을 보면 진짜 소피가 내 옆에 있는 것 같았다. 감독님이 혹시 그녀를 상상한 뒤에 캐릭터를 그린 게 아니었을까. 이 영화를 보면서, 모든 것이 디지털로 이루어지는 시대이지만 사람의 마음은 디지털이 될 수 없음을 관객이 알아주길 바란다.
황무지 마녀 l 미와 아키히로
미야자키는 나에게 “아무리 고쳐그려도 황무지 마녀는 당신과 닮은 모습이 되어버린다”는 말을 하면서 나에게 캐스팅 제의를 했다. 황무지 마녀의 모습을 보고, 내가 이렇게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웃음) 나는 작업 중 기무라와 마주친 일이 한번도 없었지만, 영화 속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듣고 정말 놀랐다. 그의 목소리는 원래 어둡고 낮은 목소리였는데, 여러 가지 면모를 가지고 있는 하울의 목소리를 정말 완벽하게 소화했고 심지어 섹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기무라 다쿠야, 계속되는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고 커튼 뒤에 몸을 숨긴다). 스마프들은 모두 노래랑 춤은 별로인데 연기는 하나같이 잘하는 것 같다. (일동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