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남녀의 대화가 영화의 주제이자 해설인 <비포 선셋>
후속편들의 계절인 여름 내내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달콤하고 총명하며 아주 낭만적인 <비포 선셋>만큼 뛰어난 후속편은 없을 것 같다. 수수한 영화이며 이루기 어려운 성취인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최신작에서 1995년작 <비포 선라이즈>의 호감가는 수다쟁이 주인공들,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가 9년 뒤 셀린느가 사는 파리에서 재회한다.
제목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설명하듯 <비포 선라이즈>는 잘 통하는 한쌍의 남녀, 섬세한 애송이 미국인 뺀질이 제시와 대담한 허풍쟁이 프랑스인 여학생 셀린느가 우연히 만나 12시간 동안 겪는 모험을 보여주고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남기며 끝났다. 시나리오 작업에서부터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대담하게 자기들을 투영시킨 <비포 선셋>은 이들이 만났다면 어떨까 하는 가정을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하면 더이상 턱수염을 길게 기르지 않은, 성공한 작가 제시가 유럽 출판 홍보 여행 중 자기가 쓴 <비포 선라이즈>를 레프트 뱅크 인스티튜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서 읽어준다. 그가 몇 시간 뒤면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 셀린느가 나타난다. 짧은 초면 이후 6개월 만에 만나자던 약속을 지키지도 못하고 이제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80분간 지속되는 삶과 사랑에 대한 대화
물론 그들은 대화한다. 하지만 비상한 점은 이들의 대화의 질이 아니라 링클레이터가 대화를 보여주는 방법이다. 카메라는 파리 거리를 거니는 이들을 트래킹숏으로 보여주다가 곧 그들 각자의 과거를 회상하곤 한다. 처음엔 거부감이 좀 일었지만 점차 각자의 독특한 이야기 리듬에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덧없이 흘러버린 시간을 확연히 느끼며 셀린느와 제시는 걸음걸이를 빨리하고 수다를 떨며 서로 어떻게 지냈는가를 알아내기도 하고 수십분 동안 카페에 앉아 각자의 인생을 들려주며 첫 만남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다. 다시 걷다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외면하기 힘든, 불빛에 비쳐 알록달록한 나무 그늘 아래서 더 많은 개인 사정을 밝힌다.
링클레이터의 배역들은 미국영화치고 대사가 많아서 거의 에릭 로메르의 배역들에 비견될 만하다. 하지만 <비포 선셋>의 대사들은 <슬래커>나 <웨이킹 라이프>(심지어 <스쿨 오브 락>까지)를 특징짓는 모놀로그를 넘어선다. 셀린느와 제시는 남들에게서 떨어져 함께 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처럼 이말 저말을 해대며 서로에게 빠져든다. 우연의 속성과 기억, 노쇠와 찰나, 멸성의 암시와 변화의 가능성들을 망라하는 그들의 대화가 영화의 주제이자 그 해설이다. 이젠 이 인기배우들이 시간의 경과를 의인화한다(80분 동안의 이야기를 80분 동안 들려주는 이 영화도 그렇다).
전편에서 배우들이 재현한 섬뜩할 정도의 사실주의적 교류가 없었다면 이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델피도 호크도 <비포 선라이즈>에서만큼 호소력 있던 적이 있던가. 그의 열정은 그녀에게서 기대치 않던 따뜻함을 일으켰고 그녀의 지성은 그에게 영감을 주어 독창적인 재치를 낳았다.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학생들로서 그들은 아스테어와 로저스처럼 좋은 팀을 만들었으니 링클레이터가 이들을 <웨이킹 라이프>의 한 장면에 출연시킨 이유도 이해가 된다. <비포 선셋>은 올해의 다른 일급 미국영화, <이터널 선샤인>보다 더 사랑의 효과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또 다른 새로운 낭만주의의 패러다임인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만큼이나 소멸되는 사랑을 시인한다. 명쾌하게도 링클레이터는 후회의 장면을 센강 관광선 위에서 보여준다. 강물은 거꾸러 흘러갈 수 없는 법이니까.
<비포 선셋>은 두 드라마를 제공한다. 그 하나는 놀라움으로 가득 찼지만 돌이켜보면 말이 되는 셀린느와 제시의 드라마로 순수한 마음을 깊게 감동시킨다. 두 번째는 링클레이터의 개인적인 곡예이다. 영화감독은 두 인기배우와 그들의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엄격한 미학을 가지고 감성주의에 빠지지 않으며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비상하게 맘에 드는 이 영화가 제목의 우수를 맞추기 위해 비록 2분 정도 길어졌어도 난 감독이 이걸 이루었다고 말하련다. 다른 모든 면에서 <비포 선셋>은 속편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이루었다. 더 깊고 풍부하게 전편을 완성시켰으니까.
(2004. 6. 28.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