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코프]
최민식, 류승범 주연의 류승완 감독 신작 <주먹이 운다> 촬영현장
2004-11-29
글 : 김도훈
사진 : 오계옥
‘인간 샌드백’에게 스트레스 풀러 오세요.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 지난 11월12일 오후 3시. 분당 서현역 광장에서 최민식이 혼자 울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최민식의 주먹이 혼자 울고 있다. “인간 샌드백이 되어 스트레스를 풀어드립니다. 남자 1분, 여자 2분 1만원. 전 아세안 게임 은메달리스트”라고 적힌 피켓을 차가운 바닥에 세워두고, 최민식은 목을 놓아 지른다. “오세요! 오세요! 스트레스를 풀어드립니다!” 둘러서서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는 군중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광장은 링이고, 돈벌이의 무대고, 삶의 수단이다. 오래되고 낡은 트레이닝복이 땀에 물드는 만큼 만원짜리 지폐는 많아 질 것이고, 오늘도 목구멍에 풀칠은 할 수 있을 게다.

<주먹이 운다>의 촬영현장은 그렇게 혼재된 감정이 폭발하는 장소다. 엑스트라들과 기자들과 지나가는 행인들로 정신없는 역전 광장의 중심에서 핸드헬드 카메라는 자유로운 최민식의 동선을 재빠르게 쫓는다. 그런가 하면 광장에서 골목길을 10여m 들어가면 숨겨진 류승완 감독의 의자와 모니터가 있다. “편하게! 신나게! 그렇게 갑시다!” 최민식은 신나게 맞는다. 실연한 여자에게도 신나게 맞고, 덩치가 두배는 될 빡빡머리 양아치에게도 신나게 맞는다. 주먹이 운다 울어. 감독의 “컷!” 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최민식은 좁은 골목을 달려 류승완 감독 옆의 의자에 털썩 앉는다. 감독은 여전히 별다른 지시가 없다. 최민식, 류승범처럼 감각이 좋은 배우들과 영화를 만들려면 열린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류승완 감독은 “<주먹이 운다> 현장이 일종의 영화 공동체와도 같다”고 말한다. 최소한의 상황만 던져주고는, 각 파트의 담당자들이 해석해내는 것들의 조합만을 맞추어간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스스로를 양치기 목동 같다고 표현한다. 핸드헬드를 주로 쓰는 이유도 바로 그 자유로움을 카메라로 만끽하기 위해서다. “배우의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 핸드헬드가 가장 좋다. 심지어는 스테디캠도 그 맛을 살려내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매끄러운 영화가 아니라 투박하고 거친 영화니까.”

전직 아마추어 복서에서 가족을 가진 중소기업가로, 거기에서 주저앉아 인간 샌드백으로 맞으며 돈을 버는 거리의 복서까지. 일본 신주쿠의 실존하는 인간 샌드백 ‘하레루야 아키라’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캐릭터 ‘강태식’은 이제 최민식 그 자신이다. “최민식 선배는, 정말로 사람 같지 않을 때가 있다. 연기할 때는 혼을 어디다가 내놓고 온 것 같다”는 감독의 찬사에서 5kg 이상을 감량하고, 지난 추석부터 서울체고의 선생에게 복싱을 배워온 이 독한 남자에 대한 감독의 믿음이 진득하게 드러난다.

해가 슬쩍 신도시의 아파트 사이로 떨어질 쯤 마지막 촬영이 끝났다. 또 한번 길거리에서 두들겨맞은 최민식이 모니터 앞으로 달려와서는 땀에 흠뻑 젖은 헤드 기어를 끄르며 호탕하게 한마디 던진다. “아이고오. 먹고사는 것도 가지가지다! 남자 손님은 이제 받지 말아야겠어.” 나이가 있어서인지 아무리 운동을 해도 각이 잘 안 잡힌다며 껄껄 웃는 그는 “승범이 나이만 되었어도…”라며 은근한 경쟁의식을 내비친다. 류승범이 연기하는 20대 초반의 복서 ‘상환’은 극의 마지막에 가서야 ‘태식’과 만나게 되는 캐릭터라 아직까지 최민식은 상대역을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다. 감독에 따르자면 류승범의 경쟁심도 이미 하늘을 찌르고 있다고. “저는 뒤에서 싹 뽑아 먹을 것만 뽑아 먹으면 돼요.” 약은 감독 같으니라고.

<주먹이 운다>는 11월12일로 27회차 촬영을 마쳤고, 분당에서의 촬영이 종료되면 절반의 고된 중턱을 넘어선다. “피와 땀과 침이 튀는 처절한 영화”라고 <주먹이 운다>를 설명하는 류승완 감독은 “내 진심, 주인공들의 진심을 담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매일 물어본다”고 수줍게 고백한다. 그 진심을 담은 최민식과 류승범의 울부짖는 주먹은 내년 5월 스크린으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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