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귀여워! 영화 <귀여워>는 귀엽다. 박수무당 장수로도 귀엽고, 퀵서비스맨 963도 귀엽고, 레커차 운전사 개코도 귀엽고, 깍두기 조폭 뭐시기도 귀엽다. 그러나 귀여움의 필살기는 모두 순이에게서 나온다. 궁상맞게 귀여운 네 부자를 치마폭에 가슴폭에 포옥 담고 튀어다니는 여자. <요술공주 밍키>의 주제가를 부르다가 밍키가 되어버리는 여자. 교통체증으로 꽉 막힌 도로에서 뻥튀기를 팔다가 ‘주워진’ 순이는, 너무나 귀여운 나머지 학대해버리고 싶은 여자다. 섹스하고 싶어지고, 결혼하고 싶어지고, 가슴을 만지고 싶어지고, 사창가에 팔아버리고 싶어질 만큼 귀엽다. 사도-마조히즘의 발로라 욕하지 말라. 순이는 사람이기 이전에 판타지이며, 여성이기 이전에 여신인 캐릭터다. 이 무시무시하게 무성적인 캐릭터를 예지원은 몸속에 품고 연기한다. 순이가 예지원이고, 예지원이 순이 같다. 다른 배우를 재빨리 떠올릴 겨를이 없다.
“순이라는 캐릭터는 이유가 없어요. 과거가 필요없는 여자죠. 지금 현재의 모습이 중요한 여자니까요. 이 여자가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해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네 부자는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는 외골수들이잖아요. 그런데 순이가 오면서 그 인간들이 싹 바뀌고 말죠. 순이가 아닌 다른 여자가 그럴 수 있었을까요. 순이는 네명 모두에게 다 진심으로 다가간 여자였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던 거고. 마음을 터놓고 내면으로 그들 한명한명을 올곧게 보아준 유일한 여자였고. 게다가 순이는 사람을 ‘귀엽게’ 사람으로 좋아해주는 존재니까요. 그 순이가 제 안에 있어요. 당당하게 자신을 믿는 여자. 하지만 실제로는 저 역시도 언제나 시선을 조심하며 살아가게 되니까, 순이라는 아이의 당당함이 부럽기도 하죠.”
예지원이 <귀여워>에 참여하게 된 것도 운명이었다. 영화가 정말 좋으면 남의 말은 절대로 듣지 않고 달려든다는 예지원은 김수현 감독이 ‘그려온’ 시나리오를 보고 씨익 웃고 말았다. 감독의 시나리오는 글이 아니라 만화로 되어 있었고, 게다가 퀵서비스맨 963의 얼굴이 모두 감독 얼굴로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웬만한 여배우라면 ‘지금 장난치냐’며 신인감독의 얼굴에 시나리오를 휘익 집어던졌을 테지만, 예지원은 이거야말로 내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무작정 뛰어들었다. 개봉이 심각하게 미루어지긴 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현장에서 롤러스케이트도 타고, 혼자서 미친 듯이 동요를 불러젖히기도 하고, “순이는 모든 사람에게 반말을 하니까 나한테도 그러라”는 친구 같은 감독과의 작업도 “놀기에는 딱”이었다.
“시나리오를 읽으니까 그냥 씨익 웃음이 나는 거죠. <귀여워>라는 제목만 보고는 이게 무슨 로맨틱코미디인가 싶었는데. 배경은 희한하게도 황학동인데다가 직업들도 굉장히 특이하고. 그런데 뭐 결국은 다 ‘귀여워’인 거죠. 처음 접하면 당혹스럽고 ‘뭐야! 하나도 안 귀여워!’ 하다가 결국 나중에는 씨익 웃으면서 ‘아이 귀엽네’ 하고 나오게 되는 거. 그리고 2년여가 흘렀죠. 대본부터 너무 좋아했던 터라 저한테는 굉장히 특별한 영화가 되었어요. 스탭들도 여전히 저를 순이라고 부르고 있고, 찍는 동안도 축제 기간처럼 보냈고, 친구도 많이 생겼고. 하나 걱정이 있었다면 이런 거였죠. 그런데 이걸 과연 사람들이 제대로 받아들여줄까?”
인터넷으로 예지원을 검색하면 ‘예지원’(禮智院)이 제일 먼저 다가온다. 제34기 규수반 단기과정을 모집한다는 예절의 전당. 그런가 하면 제사음식 문화를 올바르게 정착시키는 것이 최대의 목표라는 전통제수차림전문점 ‘예지원’도 있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배우 예지원의 이름은 이렇게도 유쾌한 반동의 트릭이다. 케이블 방송계의 컬트영화인 <96 뽕>으로부터 “우리 사회도 다양한 체위를 경험해봐야 한다”며 국회 담을 넘던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의원출마 윤락녀, 거기에다 “키스할래요?”라며 넌지시 남자를 유혹하던 <생활의 발견>까지.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와 “만져주세요. 더더더더더러워지고 싶어요”라고 노래하는 뮤지컬 <록키 호러 픽처쇼>의 자넷까지. 출연작마다 예지원은 (남성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온전한 여자의 욕망을 까르르르 발산시키며 몸부림치는 그릇이었다. 예지원 제34기 규수반의 특강 강사로 초빙될 재원은 아닌 셈이다.
“<버자이너 모놀로그>도 그렇고, <96 뽕> 역시도 갇혀 있는 여자를 뻥 터뜨리는 역할이었다는 데 동의해요. 사실 출연할 당시에는 ‘이게 여자영화구나’ 하는 생각 같은 건 없었는데, 나중에는 ‘오호, 여자를 이렇게까지 생각하다니’ 하며 무척이나 감동했어요. ‘남자들이 여자 캐릭터를 두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감동. ‘평생 이런 걸 또 할 수 있을까?’ 하는 연기자로서의 자긍심. 그리고 그런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서 찾아오는 배우로서의 대리만족이죠. 내 진짜 모습들이 그런 역할들에 다 투영돼 있는 것 같아요. 순이는 길들여지지 않은 지원이. 드라마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미자는 적당히 길들여지고 타협하고 소심한 지원이. <96 뽕>은 망가지고 밝히는 색광 지원이. 지금까지 제가 맡았던 역할들은 거의 다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는 역할이어서 좋았어요. 그래서 여성팬도 많고….”
예지원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쉬는 날에는 요가를 배운다 그랬던가. 사진기자의 셔터 누르는 속도조차 그 변화무쌍한 포즈를 좇기 쉽지 않다. 한발로 섰다가, 주저앉았다가, 상체를 애크러배틱한 자세로 기울인다. “잘리든 말든 카메라 돌아가는 앞에서 순간적인 애드리브를 하는 게 너무 좋다”는 그는 ‘몸’의 연기자다. “목숨 걸고 찍었다”는 레커차 장면에서 차창 밖으로 상체를 고스란히 내놓고 바람의 맛을 느끼던 순이. “너무 튀다가 크게 다칠 뻔했다”는 영화의 시작장면에서 중력을 거스르듯 허공으로 튀어오르며 ‘아이 귀여워’를 외치던 순이. 8등신과 풍만한 가슴이 여배우의 몸의 미학이라 뻣뻣하게 믿는 이들에게, 예지원은 쉽게 수긍할 수 없을 만큼 자유로운 몸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큰 스크린에 어울린다고요? 의견이 분분해요. 역시 넌 TV야! 하는 사람도 있고, 스크린으로 볼 땐 크더니 왜 작아? 하는 분들도 있고. 어떤 분은 너무 예쁘다고 그러고, 어떤 분은 너무 못생겼다고 그러고. 친구들 반응도 다 달라요. 이렇게 의견이 분분하니 어쩌겠어요. 그냥 내 소신대로 살아야지. 사람들 말은 안 들을려고 해요. 마음 내키는 대로 그때그때 소신껏 살아야죠.”
결국 순이는 떠나간다. 치마폭에 포옥 싸두었던 황학동 아파트의 네 남자를 뒤로하고, 원래부터 거기에 없었던 신기루처럼 팡! 하고 사라진다. 인터뷰와 사진 촬영을 마친 예지원이 시간에 쫓겨 드레스 차림 그대로 스튜디오를 빠져나가자 거기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늦은 밤의 신기루 같은 착시현상이었을까. 가벼워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새빨간 럭비공 하나가 3시간 동안 마음껏 놀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딘가로 튀어가버린 것처럼, 예지원은 내키는 대로 튀어가버릴 것이다. “오늘은 어떤 일이 펼쳐지∼일까” 하고 노래 부르며, 변신하고, 변태하고, 탈태하면서. 그렇게 자유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