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몇년 전 망년회의 기억을 들려주며 “모두 술취해 쓰러져 있는데 혼자 멀쩡한 정신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챙겨주던, 그 자리의 마지막 남은 이성(理性)”이었다고 말한다. 그럴 것도 같다. 곱고 반듯한 얼굴과 이름이 주는 느낌은 어찌나 바른지, 김석훈은 얄밉게 머릴 굴리느니 예의 갖춰 고개를 한번 더 숙일 사람이다. 잡음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 그리고 눈가의 선량함 덕에 쉽게 오해받을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이, 한번 움직이려면 의외로 운신의 폭이 좁다. 스스로 말하듯 “전형적인 A형”의 우유부단함까지 있는지라, 뭘 크게 지르지도 못하고, 크게 질렀는데 결과가 안 좋다고 악다구니를 부리는 것도 아니다.
이 가시적인 이미지에서 보자면, <귀여워>는 그에게 ‘대단한 도전’쯤 된다. 김수현 감독의 이 시끌벅적한 데뷔작은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까다로운 영화다. 아버지와 세 아들이 한 여자에게 품은 저마다의 판타지. 황학동이라는, 더 무너질 것도 없는 개발촌을 감싸는 이상한 생명력과 짭조름한 리얼리티. 김석훈의 역할은 무당 장수로의 첫째아들 ‘후까시 963’이다. 963은 퀵서비스 오토바이 한대로 서울 곳곳을 누비면서 억눌린 맘의 답답함을 해소하고, 순이(예지원)에겐 “오토바이 뒤에 여자를 태운 건 니가 처음이야”라는 고백과 헬멧 하나를 선물로 남겨주는 것이 고작인 남자다. “저한테도 어떤 이미지가 있잖아요. 거기서 새로운 이미지로 가기 위해 노력하진 않았던 거 같아요. 이해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겠다 싶으면 했던 건데, <귀여워>는, 솔직히 시나리오를 다 이해할 순 없었어요. 근데 특이했고, 한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했던 거죠.” 영화가 상업적이지 않을 줄 알았다고 했다. 기자와 평론가들은 좋아할 줄 알았고, 대중은 어려워할 줄 알았다고 했다. 이 영화를 하기로 맘먹을 무렵에 주위에선 정재영이 맡았던 뭐시기 역할이 더 낫겠다는 의견을 들려줬지만 그는 자기가 963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쉽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963이란 캐릭터에 대해서 제가 세운 원칙은 딱 세 가지였어요. 첫 번째는 순이에 대한 사랑. 지고지순한 사랑을 추구하는 로맨틱한 감정. 두 번째는, 퀵서비스하는 사람은 지금보다 높은 배기량의 오토바이를 타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보통 125cc를 타고 다니는데, 그건 자동차 면허만 있어도 탈 수 있는 거거든요. 좀더 높은 배기량의 오토바이를 타려면 따로 면허를 따야 해요. 그런 더 강한 오토바이에 대한 집착, 야생마적인 기질. 그리고 세 번째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 제임스 딘의 <이유없는 반항>과 비슷한. 근데, 감독이 말하는 정서를 충분히 이해하진 못했던 거 같아요. 지금 말한 각각의 것들을 장면마다 보여줄 순 있었지만 그걸 가지고 하나의 일관된 캐릭터로 나아가긴 힘들었던 거 같아요.”
서너번 그는, 요즘 의기소침한 상태라고 말했다. “스타는 천운을 타고나야 된다 그러잖아요. 근데, 모르겠어요. 후배들이 물어봐요. 형, 어떻게 하면 스타가 될 수 있어요? 전 진짜 모르겠어요. 열심히 해야죠, 뭐. <튜브> 하면서는 야, 이건 대박이다, 속으로 그랬어요. <귀여워>랑 정반대라고 생각하면 돼요. 기자나 평론가들은 별로 안 좋아하고 관객은 좋아할 줄 알았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작가영화 해서 평가를 받아보자. 어려운 거 같아요. 쉽게 뜨는 놈도 물론 있죠. 근데 난 그건 아닌 것 같고.” 스스로는 독설가 기질이 있어서, 자길 본 사람들이 다들 얘기해보면 놀란다지만, 그리고 몇번 직설적인 표현이 튀어나왔을 때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기질은 고생을 모르는 순한 눈매를 닮았다. “제 성격에는요 영화를 찍기 위한 그 싸움, 엄청난 고집, 집념, 거기서 빚어지는 갈등, 와, 그건 힘들 거 같아요.” 인생의 쓴맛 등을 운운하려는 찰나 그가 말을 잇는다. “난 고생 안 해봤거든. 대학 졸업하고 바로 국립극단에 월급받고 다녔고 드라마도 주인공으로 데뷔했으니까. 지금부터 고생을 한다, 라고 하면 끔찍하지만. (웃음) 더 고생을 할 것 같긴 한데….”
얼마 전에 택시를 탔는데 운전기사 아저씨의 말이 명언이었다고, 그는 그 명언을 성량 좋은 목소리로 공유시켜줬다. “원래 대기업 과장인가 부장인가 그랬대요. 외국 지사의 무슨 프로젝트를 떠맡아서 더 잘해보려고 했는데 안 됐다는 거야. 그러면서, 젊은이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꾸준히 하래요.” 그 방법이 그에겐 가장 맞을 것 같다. 누구에게라도 맞는 이야기겠지만, 악다구니 부릴 줄 모르는 착실한 친구가 계속 부모님과 선생님들께 사랑받고 친구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도 알고 보면 그게 핵심일지 모른다. 그는 1∼2년 뒤를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