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완벽한 ‘역도산’의 현현, 설경구
2004-12-10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큰 배우가 준비하는 큰 영화에는 언제나 관심이 쏠리기 마련이지만, 올 한해 <역도산>의 설경구(36)만큼 많은 시선을 받은 배우는 없다. 살이 얼마나 쪘네, 일본어 대사 실력이 어떻네 등 촬영현장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화제를 낳은 설경구의 <역도산>, 또는 <역도산>의 설경구는 적어도 하반기 충무로 최대의 궁금증이었다.

늘어난 덩치만큼 넓어진 연기, 거친 반골기질, 역도산과 닮아

싱겁지만 결론은 ‘역시’다. <박하사탕> 때 이미 연기의 한 정점을 보여준 설경구는 이번 <역도산>에서는 늘어난 체적만큼이나 넓어진 연기폭을 과시한다. 링에 고꾸라지는 그의 앙다문 입술 대신 바닥에 뭉개지는 어깨가 비명을 지를 때, 함께 연기한 일본 배우 후지 다쓰야의 말대로 그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 처럼 보인다.

변한 건 덩치가 아니라 얼굴

<역도산> 촬영 내내 가장 화제가 됐던 건 30kg 가까이 찐 살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오아시스>의 종두가 보면 비실비실 피하다가 자빠질만큼 ‘갑빠’가 됐다. 그러나 스크린에서 그의 변화는 몸이 아니라 얼굴에서 느껴진다. “딱 한번 사는 인생, 착한 척할 시간 어딨냐?” 고향 친구에게 말할 때, 플래시와 환호가 터지는 링에서 이름이 호명될 때, 웃을 때조차 그의 얼굴은 15도쯤 왼쪽으로 기울고, 시선과 입도 비슷한 각도로 돌아가 있다. 교만과 냉소, 경쟁심과 불안감이 복잡하게 얽힌 표정이다. <역도산>은 레슬링이라는 몸의 움직임이 주가 되는 영화임에도 <박하사탕>의 ‘나 돌아갈래’ 이후 설경구의 얼굴 연기가 오래 기억될 작품이 될 것 같다.

충돌, 역도산과 설경구를 이끌어가는 힘

“처음엔 ‘미친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의 비열함마저 연민이 느껴지더라. 원하는 걸 쥐는 순간 바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인물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스크린 밖에서는 대체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앉아 누군가의 너스레에 피식피식 웃고 있을 설경구를 매순간 숨막히는 생존의지와 경쟁심으로 가득찼던 실제의 역도산과 비교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그럼에도 <역도산>에서 정확히 자신의 1.5배 되는 현직 프로 레슬링 선수들을 아무런 카메라 트릭없이 숨가쁘게 메치고 메침당하는 설경구를 보면 “에이, 역도산같은 인간”이라고 절로 고개를 젓게 된다. 설경구 역시 “충돌이나 거친 걸 좋아하고, 반골기질이 있다는 점에서 역도산과 비슷할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진실은 그 이상이다. 역도산을 최고로 만든 건 힘이나 기술만이 아니었듯, 연기력만으로 다 채울 수 없는 독한 근성이 없었다면 ‘설경구판 역도산’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배우같지 않은, 타고난 배우

설경구는 ‘배우같지 않은, 타고난 배우’라는 형용모순이 딱 들어맞는 사람이다. 그는 배우지만 카메라에 얼굴 들이대고 “관객 여러분 재밌게 봐주세요”라는 말같은 건 농담으로도 못한다. 촬영 현장에서도 남보기에는 대본없이 ‘설렁설렁’ 다니다가 카메라 앞에만 서면 180도 변한다. 그가 대본을 ‘멀리 한다’는 건 이창동 감독과 강우석 감독이 증언한 사실이다. 진상은 이렇다. “설마 대사 모르고 달려들겠는가. 다만 ‘외운다’는 말이 싫다. 틀을 짜 놓고 준비하면 더 불안해진다. 매 순간 버겁고 속을 긁어대면서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육감으로 밀고간다. 그럴땐 내가 어디로 가는 지 나도 모른다. 그냥 가다 보면 길이 나오겠지 하며 간다.”

사진=한겨레 윤운식 기자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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