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0년대 일본에서는 이름만 써도 편지가 배달되는 사람이 딱 둘이라는 이야기가 회자됐다. 천황과 역도산. 일제시대인 1924년 한국에서 김신락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십대 후반 일본에 건너간 역도산은 스모 1인자를 꿈꾸다 프로레슬러로 전향해 성공했다. 가라데촙으로 거구의 미국레슬러를 통쾌하게 쓰러뜨리는 역도산은 패전국 일본의 국민적 영웅이었고, 1963년 야쿠자의 칼을 맞고 사망한 이후에는 거의 신화가 됐다. 지금까지 나온 그에 관한 책들만도 2백여 가지일 정도. 그러나 프로레슬링의 세계가 그렇듯 그는 환상의 ‘수퍼맨’ 일뿐만 아니라 흥행을 위한 쇼맨십과 모사에 능한 장사꾼이기도 했다.
그동안 일본과 한국의 여러 제작사에서 시도해왔지만 결국 송해성(감독)-설경구(배우)-차승재(제작) 팀으로 ‘완성본’을 내놓게 된 <역도산>은 영웅의 일대기가 아니라 자멸을 눈 앞에 두고도 앞을 향해 달려갈 수 밖에 없었던 한 남자의 비극적 운명을 그의 덩치만큼이나 육중한 화면에 담는다.
오로지 성공에 대한 집념만으로 10년을 스모 훈련소에서 ‘조센징’으로 갖은 모욕을 견디던 역도산은 결국 승급에 밀려나자 뛰쳐나온다. 레슬링이라는 또다른 힘의 경기에는 국적이 필요없다는 걸 알고 미국으로 떠났던 그는 금의환양해 미국의 최고 선수들을 불러다 메다 꽂으며 패전 이후 일본인들의 위축된 감정을 풀어놓어놓는다.
그러나 정상에 오른 역도산에게 ‘페이스 조절’이란 없다. 천황의 아들과 그 손자가 체육관을 방문했을 때 그는 링에서 가볍게 묘기를 보여주던 후배들을 기어이 작살내서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만다. 그에게는 인생의 매순간이 진검승부이고 과도한 승부욕은 무수한 적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승부욕을 버리는 순간 그에게는 삶 전체가 무가치해진다. 결국 그는 아버지같던 후원자 칸노(후지 다쓰야)와 결별하면서까지 몰락이 정해진 길을 간다.
<역도산>은 좀처럼 트릭을 쓰지 않는 영화다. 대역없이 설경구와 실제 선수들과 대결하는 레슬링 장면에서 화면은 거의 링 밖에서 중계하듯 따라간다. 영웅 역도산의 뒷모습을 따라가는 방식도 감상에 호소하기 어렵지 않은 몇몇 순간들에서조차 신파의 함정을 빠져나가려고 애쓴다. 화면은 격렬한 액션을 보여주면서도 품위와 격조를 잃지 않고, 분노와 불안으로 이글거리는 역도산의 눈빛을 바라보는 시선도 점잖게 한발짝 떨어져 있다. 그만큼 역도산의 ‘생짜’ 감정은 피부로 체감되지 않는다.
스모선수 시절부터 일본 사회와 유일하게 끈을 이어주던 칸노와 역도산의 질긴 애증관계는 한·일 배우의 진검승부처럼 세심하면서도 강렬하게 묘사된다. 후지 다쓰야는 <감각의 제국>에서 주연했던 배우로 최근에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에서 왜소하고 쓸쓸한 중년의 아버지로 열연했다. 15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