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2004 베이징 한국영화제, 언론은 들뜬 반응 보였지만 행사진행은 미흡
2004-12-14
글 : 문석

아직은 안개 속에 머문 영화 교류그곳에 한류는 없었다. 2004 베이징 한국영화제를 위해 한국 배우와 감독, 스탭 등이 입국한 12월2일 베이징 공항에는 축하공연을 위해 찾은 쥬얼리의 팬만이 몇몇 모여 있었을 뿐, 최근 일본에서 목도됐던 거대한 인파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무겁게 내려앉은 회색빛 하늘만이 생뚱맞게 한국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몇십 미터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갑갑한 안개 속을 뚫고 행사 기자회견장인 조어대(釣魚臺·중국의 국빈용 숙소)로 달려갈 때까지만 해도 이 행사가 내걸고 있는 ‘한·중 영화협력을 통한 세계무대로의 도약’이라는 슬로건은 무망한 듯 느껴졌다. 아직까지 중국 안에서 공식적으로 개봉된 한국영화라고 해야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 <클래식>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등 몇편이 고작인 상황에서 뜨거운 반응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자회견이 열린 조어대 방비원으로 들어서는 순간, 예상치 않았던 열기가 느껴졌다. 100명이 넘는 중국 기자들이 대부분 일어선 채 한국 영화배우와 감독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태극기 휘날리며> 해적판으로 인기

한국의 영화진흥위원회와 중앙일보, 중국 최대의 영화사라 할 수 있는 차이나필름과 중국영화의 해외진출을 모색하는 기구인 중국영화해외추광중심이 함께 주최한 2004 베이징 한국영화제는 이렇게 안개 속의 미동처럼 시작됐다. 이번 행사를 통해 중국에 소개된 영화는 개막작인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비롯해 <오! 브라더스> <연애소설> <어린 신부> <오아시스> <동갑내기 과외하기> <싱글즈> <장화, 홍련> <원더풀 데이즈> <말죽거리 잔혹사> <클래식> <오버 더 레인보우> 등 모두 12편. 이들 영화와 함께 중국 대륙을 찾은 영화인은 <봄 여름…>의 김기덕, <연애소설>의 이한, <오! 브라더스>의 김용하 감독과 <연애소설>에 출연했던 차태현과 이은주 등이었으며, 상영작과는 무관하게 강제규 감독과 장서희, 장신영도 함께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개봉은 못했지만, 중국 대중의 상당수가 VCD와 DVD로 <쉬리>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본 탓에 강제규 감독은 중국 언론의 관심을 모았고, 장서희 역시 중국 브라운관을 강타하고 있는 <인어아가씨>의 영향 덕에 인기를 누렸다.

△ 영화제 핸드프린팅 행사에 몰려든 중국 관객 (오른쪽 사진)

영화 상영은 12월3일부터 5일까지 베이징의 거대한 빌딩 콤플렉스 ‘동방신천지’ 지하의 신세기 멀티플렉스에서 열렸다. 개막일이 금요일인 탓에 상영관 안에는 일반 관객이 많지 않았지만, <엽기적인 그녀>를 통해 중국에 팬을 확보하고 있는 차태현의 무대인사 때는 수십명의 중국 팬들이 “차태현 사랑해요”를 외치며 뜨거운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개막작인 <봄 여름…> 상영 전 열린 감독 간담회 자리에서는 “저는 김기덕 감독님의 영화 대부분을 봤습니다”라고 시작하는 중국 기자들의 열띤 질문이 이어지기도 했다. <봄 여름…>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중국의 대학생 장영씨는 “DVD로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한국영화를 많이 봤는데, 역사적인 주제에 어울리는 장대한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와 <어린 신부>를 보려 한다”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

12월3일 조어대 호텔에서 열린 한·중 영화산업 포럼에서는 두 나라의 영화산업에 대한 개괄과 다양한 협력방안이 제시됐다. 방송과 영화를 총괄하는 중국 광전국의 고국정 전영관리부 부부장은 “<영웅> <사면매복> 등 중국영화가 해외에서 큰 성공을 거뒀고, 2003년 중국영화가 국내 시장점유율에서 외화점유율을 앞섰다”며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후 해외자본, 영화사와의 협력을 강화할 뜻을 내비쳤다. 중국전영해외추광중심의 주영덕 주임은 “현재 1년에 20여편만이 분장제(수익을 중국과 배분하는 시스템) 영화로 들어오고 있는데, 대부분이 할리우드영화이지만 앞으로 아시아영화가 늘었으면 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내년부터는 해적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작권 보호기구를 구성할 계획을 밝혔다. <엽기적인 그녀> <태극기 휘날리며> 등 한국영화가 그동안 해적판을 통해 ‘대박’을 터뜨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미있는 발언인 셈이다.

모호한 목적의 행사와 기준없는 프로그래밍

△ 영화제 개막 만찬장면과 한·중 영화산업포럼(사진 위부터)

들뜬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번 영화제는 미흡한 인상이 짙었다. 애초 10월로 잡혔던 행사 일정이 주최쪽의 여러 문제로 연기되면서 참여하려던 게스트들이 대거 불참해 규모가 다소 왜소해졌으며, 중국 내 홍보 또한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번 영화제를 통해 양쪽이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인 목표가 다소 모호하고 행사 또한 실질적인 비즈니스 논의보다는 의례적인 만남 위주로 이뤄져 일부 참가자들은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한국의 한 투자·배급사 간부는 “한국영화의 본질을 보여주려면 그야말로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와 감독들이 참여해야 했는데, 다소 부족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공동경비구역 JSA> <태극기 휘날리며> <사마리아> 같은 영화가 상영되지 않아 아쉽다”는 <베이징만보>의 한 기자의 말처럼 최근 한국영화의 대표작이 다수 빠졌고, 특별한 기준이나 방향성이 없이 선정된 프로그램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반면 영화진흥위원회 해외진흥팀의 황동미씨는 “그동안 중국과 어떤 식으로든 공동으로 사업을 펼쳐야 한다는 당위는 존재했지만, 구체적인 방법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 행사를 통해 서로에 대한 환상을 없애고 정확하게 이해할 계기를 마련했으며, 중국의 해외사업에 대한 자신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번 행사의 구체적인 성과는 내년 8월 중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중국영화제를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한 것 이외에는 특별한 게 없어 보인다. 그것은 행사 준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중국과 한국의 영화인의 교류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차적으로는 중국의 대외정책과 영화정책이 주요 변수일 것이며 ‘한류’라는 막연한 흐름에만 기대하는 우리쪽의 나태함도 있을 것. 하지만 ‘중국인과 일하려면 함께 밥을 많이 먹어야 한다’는 비즈니스 세계의 경구처럼 우선은 다양한 차원의 교류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지도 모른다. 한·중 영화교류의 미래는 베이징을 뒤덮었던 짙은 안개처럼 현재로선 미지수이지만, 영화제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서로를 만나는 가운데 맑은 햇살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베이징=글 문석·사진 박종근/ <중앙일보> 기자

중국 기자들과 한국 감독·배우의 황당문답

“저는 칸에서 수상한 적이 없는데요…”

한·중 영화교류가 아직 미흡하다는 점은 중국 기자들과 한국쪽 인사들과의 질문과 답변에서도 드러났다. 일부는 통역의 문제에서도 기인했지만, 중국 기자들이 아직 한국영화의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탓인지 ‘가장 좋아하는 중국∼’으로 시작되는, 성의가 없거나 자국 중심주의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이 한국의 기자회견장에서 매번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내년 서울에서 열릴 중국영화제에서도 이같은 해프닝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 부디 앞으로는 이런 결례를 범하지 말자는 차원에서 황당했던 문답을 정리한다.중국 기자 A> 강제규 감독님, 얼마 전 청룡영화상에서 대상을 받으셨는데, 중국의 어느 감독과 협력하고 싶으신가요.강제규> (잠시 침묵) 음…. 저는 대상을 안 받았거든요. 대상은 <실미도>가 받았습니다. <대가의 장례식>을 만든 펑샤오강 감독은 나와 잘 맞는 것 같아 가장 좋아하고 무언가 협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중국 기자 B> 김기덕 감독님, 가장 좋아하는 중국영화가 무엇입니까? 중국영화의 전망을 어떻게 보십니까.김기덕> 개인적으로 장이모 감독의 예전 작품을 좋아합니다. 최근에는 장원, 장위안, 지아장커의 영화가 많은 감동을 줬습니다. 그리고 전망에 대해서는…. (잠시 침묵) 그래도 한국에서는 중국영화를 많이 본 편에 속하는데도, 아직 부족한 것 같습니다. 내년 중국영화제 때 좋은 영화를 많이 보기 희망합니다.

중국 기자 C> 한국 여배우에게도 묻겠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중국영화가 뭔가요.장신영> (오랜 침묵) 저기…. 예전에 강시… 영화를 많이 봤고요…. 무협영화를 많이 봤습니다….

주최쪽> 이한 감독님께도 질문을 해주십시오.

중국 기자 D> 이번 영화제가 중국 내 한국 기업의 발전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이라고 보십니까.주최쪽> 이한 감독님, 답해주세요.이한> (당황하며) 네에?이충직 영진위 위원장> (서둘러) 제가 답하겠습니다. (이하 생략)

중국 기자 E> 김기덕 감독님, 칸영화제에서 수상하신 것 축하드립니다.김기덕> (어리둥절) 저는 베를린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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