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유쾌한 엄마 젖가슴으로의 퇴행 , <귀여워>
2004-12-15
글 : 심영섭 (평론가)

일찍이 미하일 바흐친이 이야기한 것처럼, 카니발은 시장바닥의 축제 상황이며 성, 연령, 지위, 신분 등 모든 세속적 세계의 신분들이 인정되지 않는 이른바, 일체적 공동체 ‘콤뮤니타스’적인 현실이 실현되는 ‘지랄, 발광, 난장의 굿판’의 문화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유쾌한 상대성으로 요약되는 이 세계에서 왕은 신하가 되고, 신하는 거지가 되며, 거지는 노예가 된다. 현자는 바보가 되고 바보는 도사가 되며 빈자는 부자가 된다. 김수현 감독의 <귀여워>는 기실 이 미하일 바흐친의 카니발적인 상황과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에 나오는 아들들의 음모, 부족의 수장이었던 아버지를 원시 살해 뒤 급기야는 카니발을 열어 아버지의 시체를 제물로 바쳤다는 이 떨떠름한 축제성의 뒷맛이 혼합된 기이한 여운을 남긴다. 귀여워. 그것은 상징계의 법으로 회귀 불가능한 성숙이란 방어가 깨져버린 남성 판타지에 대한 면죄부이기도 하고, 다시 그 남성 판타지가 집약된 여성의 가슴으로의 퇴행에 대한 희구이기도 하며, 온갖 ‘권위’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기호에 대한 철저한 거부, 생성과 변화에 대한 갈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귀여워? 그것은 ‘다 큰 게 징그럽다’고 손등을 맞아도 다시 슬쩍 어머니 가슴을 더듬는 어른-아이의 몸짓을 지녔다.

미숙한 어른-아이들이 벌이는 난장의 축제

기실 <귀여워> 속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반대로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들은 환상과 현실을 혼동하고 아버지에게 반말을 쓰며 태연자약하게 한 여자, 혹은 그녀의 젖가슴을 소유하기 위해 난리 블루스를 떤다. 뻥튀기 장수, 사람들의 구강적 욕망을 실컷 만족시켜주는 임무를 타고 난 여자, 순이를 만지고 싶어 안달이 난 이들은 기실 기존의 어른들의 눈으로 보자면 오이디푸스 단계 이전에 속해 있는 미숙아들이자 머리만 웃자란 기형아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라캉적으로 말하면 이 아들들은 아직도 주체가 되지 못한 채 자신과 어머니, 자신과 타자가 헷갈리는 행복한 상상계 속에 놓여 있다). 특히 막내아들 뭐시기의 경우는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분노를 집을 부순다는 상징적 파괴행위로 과잉 보상한 뒤, 조폭들과 ‘형님, 아우’라는 유사가족 관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런데 <귀여워>에서는 놀랍게도 이런 퇴행적인 아들들의 출현뿐 아니라 이 퇴행적인 아들들을 받아주는 ‘아버지’가 떡하니 출현한다. 이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부수는 파괴적 활동을 할 때, 남의 여자 자궁에 씨를 뿌리는 생산적 활동을 하는 아버지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사실이 참으로 재미있다. 의미심장하게도 장선우 감독이 연기하는 이 퇴물 아버지의 출현이 최근 2004년 한국 영화계에서 얼마나 쇼킹한 사건인가 하는 점은 일반 관객이 <귀여워>를 보는 도중 극장을 나가버리거나 게시판에 찬반양론이 불붙는 상황에서도 솔솔 새어나오는 하나의 증후임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기실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 <우리형> 같은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장르영화에서 주인공 남자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아버지의 자리는 늘 부재했다. 국가의 권위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남성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주인공들에게 아버지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은 희구의 대상이지만 그 실체가 없어서 슬픈 자리이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가 장전한 상업성, 신파적 멜로의 핵심사항이다. 나쁜 국가라도 자신들을 알아주기 바랐던 실미도의 대원들이 끝끝내 수류탄 한방에 먼지가 되어버릴 때, 아버지나 다름없이 목숨을 바쳐 동생을 지킨 형이 비오는 길거리에서 전장의 먼지 구덩이에서 죽어갈 때, 대한민국의 관객은 몹시 슬퍼한다. 그도저도 아니라면 아예 아버지는 영화 <가족>에서처럼 누군가의 칼에 찔려 죽어가는 장렬한 가부장의 모습이어야 했다.

아버지 같지 않은 아버지 장수로

그러나 <귀여워>의 박수무당 장수로는 다르다. 그는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무책임하게 씨를 뿌려대는 일부일처제를 거부하는 원시적인 족장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는 상대방에게 권위있게 보일까봐 먼저 ‘말을 트는’ 파격을 보이고, 지퍼가 찌익 내려간 채로 태연하게 아들의 절을 받는다. 장수로에게 빨간 고무장갑은 그지없이 잘 어울리고, 식구들을 벌어먹이는 아버지로서의 기초적인 임무를 포기한 듯 보여도 그닥 반성하는 기색도 없다. 이자는 도저히 아들이 동일시할 수 있는 그런 오이디푸스적인 아버지가 아니다. 장수로는 여성적 역할을 마다지 않고, 아들들에게 자신을 닮으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 아버지에게는 거세 불안이라는 아버지의 권력에서 기인하는 위엄과 존엄이 부재한다. 한때 신자(신이 내린 자)였던 아버지는 심지어 아들들이 죄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물건이 서지도 않는다. 감독 김수현은 우리 사회의 카니발, 즉 바흐친이 이야기하고 있는 대화주의 혹은 축제성의 전파가 이 전(前)오이디푸스적인 아버지의 출현, 놀이와 노동이 하나인 아버지,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이 암시하듯 고아한 예술무대가 아니라 청계천 한복판에서 생활의 체험과 불건전한 생명성을 체득한 아버지의 출현에서 시작된다고 믿는 것 같다. 이 아버지의 출현으로 영화 속의 청계천은 무간 지옥이자 연꽃이 그득한 진흙창, 혹은 TV 안테나 위에 토템이 서 있는 성과 속이 뒤얽힌 어디에도 없는 판타지로서의 실재계가 된다(아! 청계천에는 자기 이름자에 들어 있는 푸른 물이 없다). 어질한 자본주의의 속도 문명을 방관하면서 그 중심에서 상징계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이곳은 이윽고 안과 밖이 없고, 어른은 아이 같고 아이는 어른 같은, TV가 구현하는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가 없는 시멘트 동굴이 된다.

그래서 거꾸로 세 아들과 아버지의 한 여자에 대한 티격태격 난장판 코믹 버전은 그 아버지의 물건이 회복되면서 즉 장수로가 오이디푸스적인 면모를 지니고 아들들의 거대 젖가슴의 판타지를 만족시켜주었던 상징적 어머니인 순이와의 ‘결혼’을 꿈꾸는 단계에서부터 급격히 신명의 에너지를 잃어버리는 것 같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영화(역시 바흐친의 축제성 담론과 잘 맞아떨어지는)와 김수현의 영화는 그 궤적을 달리한다. 소주잔 대신 숟가락이 떠오르는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영화에서 감독의 상상력의 동력은 난장판의 연옥에서도 꿈꿀 수 있는 자연과의 교합으로 부활하는 인간성의 향연에 있었다. 쿠스투리차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세계에서 돼지는 중고차를 뜯어먹고,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의 침대는 공중으로 떠올라 숲 위를 날아간다. 그 세계는, 애니미즘적인 상상의 세계는, 영화 내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은 감독의 떠들썩한 조증에, 그 에너지에 감염되는 경험을 한다. 전쟁과 독재의 대공포화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낙관주의와 순결한 사랑에 대한 환상이 어깨를 들썩인다.

그러나 <귀여워>의 아들들은 쿠스투리차의 자연 대신 또다시 이 사회의 그물망에 낚여 현대성이 낳는 어질한 물신주의와 결합하면서 오이디푸스 단계를 기어이 통과하려 든다. 상상계에 머물고 있던 때 충만하던 그들의 부력은 ‘오토바이, 레커차, 칼’이라는 자본주의적 연장들과 혹은 대리 남근들과 결합하여 속도와 힘의 문제로 그들의 욕망을 치환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판타지처럼 여자를 뒤에 태우고 온 세상이 둥글게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경험을 하는 큰아들 963의 모습에서도 현실의 견고한 벽을 머리로 들이받듯 아파트를 부수려 드는 막내아들 뭐시기의 모습에서도 어떤 슬픔은 가시지 않는다. 난장의 낙관주의는 어질한 속도감각으로 치장한 청계천의 쓰레기 밑으로 점점 더 가라앉고, 카니발 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우렁차고 호탕한 ‘카니발의 웃음’, 파괴와 창조의 힘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거대한 웃음의 동력은 사라진다. 대신 확성기로 아버지의 비리를 까발리는 아들들, 아버지를 원시 살해한 뒤 ‘무’로 사라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착잡한 프로이트적인 죄의식만이 이 빈 구멍을 메우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이 아들들은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남자들과 달리 영화가 진행될수록 자신의 판타지를 판타지라고 인식하는 단계에 이른다. 비록 요술공주 밍키가 황학동의 아파트를 없애버려도, 술이 깬 아침에 바라보는 청계천 고가는 더욱 단단하게 남아 있다.

장선우의 영화 미학을 빼다박은 김수현

개인적으로 나는 여성 자궁에서 도 닦고 싶어하는 폭압적 욕망을 ‘창녀도 사람이다’라는 사회적 평등성으로 치장하는 김기덕식 작가주의보다 엄마 젖가슴으로의 퇴행, ‘소년성’ 그 자체의 솔기를 그대로 내보이는 김수현의 발랄한 자기 고백이 더 귀엽게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영화 미학적인 관점에서 나는 김수현의 아버지는 에미르 쿠스투리차가 아니라 바로 영화 속의 아버지 장선우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뽕짝과 난교의 욕망으로 이 사회의 엄숙주의를 뒤엎어버리고 장르의 경계를 지우며 질펀한 난장의 힘으로 광주의 비극을 통과하려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장선우 그 자신 아니던가. 게다가 현실은 핸드헬드로, 판타지 장면은 유려한 크레인숏으로 대비시키는 솜씨며 영화 후반부에 더 빈번하게 등장하는 점프컷 장면, 이야기나 캐릭터의 중심점을 갖는 대신 인물들을 따라가는 편집술로 오히려 은근한 소외효과를 일으키는 김수현의 솜씨는 장선우 감독의 연출방식을 그대로 빼다박았다. 그러니 이 귀여운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까먹고 더욱더 퇴행하는 길은? 아니 그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극복하고 싶어하는 적자의 욕망을 지녔는가? 김수현의 소년성이 이 사회와 어떤 화음을 낼지 <귀여워> 이후의 그의 행보는, 황지우의 시 구절대로 감독이 몸 근지러운 날 진흙 이불 덮고 진흙으로 만든 여자와 실컷 자본 뒤 스스로 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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