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비평 릴레이] <역도산>, 김소영 영화평론가
2004-12-22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세계인 설정에 너무 집착, 인생의 진한 맛 안우러난다

레슬링으로 말하자면 난 김일 세대다. 초등학교 시절, TV에서 본 김일 선수의 박치기는 늘 우리들의 화제였다. 바로 그 무렵 김일의 대스승이 역도산이라는 풍문을 들었다. 이런 전설 속의 역도산이, 그를 연기하기 위해 몸무게를 30㎏이나 불린 배우 설경구를 통해 돌아왔다. 역도산은 패전 후 미군 점령기 일본에서 천황 다음의 인기를 차지했다는 프로 레슬러다. 1924년 일제 강점하의 조선에서 태어나 씨름 선수를 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스모를 배운다. 스모의 최고 자리를 꿈꾸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좌절하자 미국에 건너가 레슬링을 익힌다.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패전 이후 정치적, 군사적으로 미국에 복속되어 버린 일본인들의 민족 정서를 동원할 수 있는 스포츠 쇼를 연출한다. 역도산의 ‘가라테 촙’에 거구의 미국 백인 레슬러들이 나가떨어지는 장면은 패전한 일본에 제공된 전대미문의 신파 활극이었다. 물론 여기서의 최대 아이러니는 가라테를 구사하는 역도산이 조선인이라는 데 있다. 전 식민지의 남성이 새 주인 미국에 짓눌린 전 주인의 마음을 달래주며, 국민 영웅이 된 셈이다. 씨름과 스모로 연마한 몸, 가라테와 레슬링을 뒤섞은 활극 쇼로 말이다.

이렇게 상당히 꼬인 사건과 인물을 다루고 있으나 영화 <역도산>은 그것을 신중하게 재구성한다. 감독 송해성은 관객들이 혹시 이 신파 활극에 빠져들까봐 근심마저 하는 눈치다. 피와 땀이 튀는 격투를 가까이서 보여주기 보다는 링 위의 삶을 롱 숏으로 지켜보게 만든다. 그래서 이 영화는 소위 1000만 관객몰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남성 최루 액션의 장르적 습속과는 거리가 멀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동원하지도 않는다.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세계인 역도산이 영화를 버티게 하는 이념적 정체성이다. 이러한 방향 설정은 세계화라는 당대의 화두에도 걸맞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상하게도 이런 납득할만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는 진한 냄새나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계급적으로 인종적으로 천대받으며 가혹한 체벌이 동반된 육체 훈련 과정을 통과하며 일본의 국민 영웅이 된 역도산의 삶에 흥건히 고여 있을 법한 피 냄새와 살 냄새가 그리 나지 않는다. 분명 영웅주의에서 풍기는 악취는 없지만, 신산한 하류 인생의 맵고 쓴 맛도 보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예의 그 장점, 즉 민족이라는 범주를 피해 세계인으로 역도산을 설정했던 것이, 오히려 관객들이 역도산이라는 식민화한 남성 주체의 내장을 가르는 듯한 고통스런 경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 것 같다. 스모선수 시절 극심한 차별과 학대를 받았으나 역도산은 그것을 자신의 입신출세에 대한 욕망으로 바꿀 뿐, 뼈아픈 자기 성찰의 순간이 없다. 실제에선 달랐겠으나 적어도 이 영화에선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너무 빨리 역도산을 세계인으로 만든 셈이다. 역도산의 몸의 언어는 씨름과 스모 그리고 가라테와 레슬링이 혼합된 것이다. 바로 그런 혼성적 ‘세계’의 육체성과 일본의 조선 거류민이라는 정체성 사이의 긴장이 영화 <역도산>이 닿을 수 있는 고산준봉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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