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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 천국인 <발레교습소>와 나쁜 어린이 나오는 <귀여워>
2004-12-22
글 : 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마이너리티의 신화를 깨다

때론 영화를 보고 나면 주인공보다 조연들의 캐릭터가 인상에 남는 경우가 있다. 전체의 줄거리보다 모호한 분위기로 기억되는 영화가 있다. <발레교습소>의 호모 에로틱한 분위기와 <귀여워>의 잔혹한 어린이 캐릭터가 그렇다.

알고 보면 게이 천국인 <발레교습소>

<발레교습소>는 19살의 청년들에게 검도도, 요가도 아니고, 굳이 ‘발레’를 시키는 감독의 의도부터가 ‘불순’하다. 이 영화는 게이 천국이다. 동성애자 캐릭터가 곳곳에 숨어 있다. 마치 동성애인권운동의 고전적인 명제인 ‘우리(동성애자)는 어디에나 있다’(We are everywhere)를 영화로 구현하겠다고 작심한 듯. 특히 남성들은 여자 애인이 있는 민재(윤계상)와 창섭(온주완)을 제외하면 온통 ‘숨은 게이’들이다. 민재·창섭·동완(이준기), 삼총사의 삼각관계가 묘하다. 영화의 도입부, 민재의 집에서 빈둥거리던 삼총사는 딱히 할 일이 없자 “텐트치고 놀까”라며 서로를 ‘덮친다’. 텐트치기는 ‘불알’ 친구들의 성적 놀이 아니던가? 사랑의 화살표도 엇갈린다. 민재는 항상 ‘애타게’ 창섭을 찾는다. 동완은 민재 없이는 못 산다. 동완은 재수학원에서 나오다 민재를 발견하고 바로 달려가서 ‘안긴다’. 찜질방에서는 민재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다. 여자친구가 없는 동완은 마치 민재의 여자친구처럼 군다. 그렇다고 민재에게 ‘찔찔 짜면서’ 매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민재의 연애사업에 적극 협조한다. 그(들)가 동성애자인지는 모호하지만, 우정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처럼 <발레교습소>는 성정체성을 다루지는 않지만, 일상에(특히 청소년기에게) 만연한 동성애를 자연스레 보여준다.

발레교습소의 다른 수강생인 비디오방 아저씨와 자장면집 아저씨도 의심스럽긴 마찬가지다. 구민센터에 어울리지 않는 발레 강좌가 개설된 사연인즉, 두 아저씨가 “구청 게시판에 개설해 달라고 난리를 쳐서”이다. 족히 50줄을 넘어선 듯 보이는 비디오방 아저씨의 가족은 지워져 있다. 발레 연습을 위해서지만, ‘붉은 립스틱’을 칠한 아저씨의 모습도 야릇하다. 자장면집 아저씨의 정체성은 삼총사의 입을 통해 슬쩍 ‘아우팅’된다. “(짱개 아저씨가) 너 보고 싶대.” 노가다를 뛰러 외도한 창섭을 다시 발레교습소로 데리고 오면서 동완이 하는 말이다.

<발레교습소>의 게이들은 평화의 수호자, 정의의 ‘사나이’들이다. 민재와 창섭이 주먹다짐을 하자 “싸우지마∼ 싸우는 거 싫어! 난 싸우는 거 제일 싫어!”라며 뜯어말리는 사람은 동완이다. 비디오방 아저씨는 왕년의 일진짱, 기태를 괴롭히는 양아치들에게 바나나 우유를 투척하고, 우산대를 휘둘러 물리친다. 이처럼 발레교습소의 동성애는 강좌를 개설하지 않는다. 마치 술래잡기하듯 얼굴들이 빼꼼히 내밀고 “나 여기 있지롱” 하고 살짝 혀를 내민 뒤 사라진다. “나 잡아봐라” 하고 관객을 유혹한다.

‘안 숨은’ 동성애자도 나온다. 수진(김민정)네 갈빗집에서 일하는 청년이다. 수진이 철없는 투정을 늘어놓자 청년은 커밍아웃을 한다. 동성애자라서 집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커밍아웃 전에도 성정체성은 드러난다. 그의 목에 동성애자를 상징하는 레인보 목걸이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영화의 동성애자 캐릭터처럼 콧소리를 내지도, 다리를 꼬지도 않는, 말 그대로 평범 청년이다. 명시적인 동성애자는 동성애자답지 않게, 모호한 동성애자 캐릭터는 기존의 이미지대로, <발레교습소>가 고정관념을 전복하는 방식이다.

레즈비언이 빠지면 섭섭하다. “황보수진, 나 너 좋아해. 사랑한다고.” 영화의 초입, 수진은 같은 반 여자친구에게 사랑 고백을 받는다. 수진은 ‘쿨’하게 거절한다. 문제는 고백이 아니라 고백을 엿들은 사람이다. 수진 엄마가 엿듣고 화들짝 놀란 것. 수진 엄마는 딸이 레즈비언이 되는 것을 염려해 딸을 발레교습소에 보내고, 파마를 하라고 권한다. 이처럼 부모들의 호모포비아(동성애공포증)도 ‘귀엽게’ 그려진다. 다만 동완 아버지의 행각은 좀 심각하다. 그는 느닷없이 발레교습소로 쳐들어와 “너희들 우리 아들한테 스타킹 신기고 개지랄 떨면 매장당할 줄 알아”라고 소리를 지르고 아들을 끌고 간다. 차라리 아들을 아우팅시키는 말이다. 나중에는 아들을 ‘족치러’ 발레 공연장까지 쫓아온다. 아버지의 과민 반응으로 동완의 정체성은 좀더 명확해진다.

‘착한 아이’ 신화를 박살내는 <귀여워>

<귀여워>는 ‘착한 어린이 신화’를 ‘아작낸다’. 이처럼 막나가는 어린이 캐릭터는 한국영화에서 ‘전무’했을 뿐 아니라 ‘후무’할 것이라고 이 필자 확신한다! <귀여워>는 ‘아이들은 착하다’는 통념은 물론 ‘겉으로 조숙한 척하지만 알고 보면 어린애’라는 어법까지 ‘죄송하지만’ 깨뜨린다. 이 영화의 남자아이들은 모두 양아치이고, 여자아이들은 까졌다. 영화는 철거촌의 폐허 위에서 폐허가 된 아이들의 심성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둘째아들 개코를 좋아하는 옆집 여자아이는 ‘라이벌’ 순이가 나타나자 온갖 투기를 일삼는다. 순이가 첫째 963과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다고 개코에게 ‘밀고’하고, 어느 날은 슬쩍 웃음을 흘리며 개코에게 다가가 “나 어제 멘스했어”라고 알린다. 음해가 통하지 않자 결국 순이의 머리채를 잡고 싸운다. 동네의 코흘리개 형제는 약에 취해 온갖 비행을 일삼는다. 악동들의 장난감은 에프킬라에 불을 붙여 만든 화염방사기다. 영화는 가족의 보호막이 부재하고, 사회의 안전망에서 밀려난 어린이의 군상을 통해, 어린이가 근대 핵가족의 발명품임을 역설한다. <귀여워>의 어른들도 아이들을 어린이가 아닌 인간으로 대접한다. 순이는 여자아이에게 ‘글라스’에 소주를 따라준다. 아이는 원샷을 한다. 개코가 여자아이를 대하는 태도도 야릇하다. 심지어 철거깡패인 셋째아들 뭐시기는 악동들에게 범죄를 ‘교사’한다. 악동들은 아파트에 석유를 뿌리고, 에프킬라 화염방사기로 불놀이를 즐긴다. 악동들의 불놀이로 아파트는 붉게 물든다.

아이는 나이의 소수자이고, 동성애자는 성정체성의 소수자다. 한국영화에서 소수자에 대한 신화는 있지만 현실은 부재했다. 지금껏 대부분의 영화에서 동성애자는 아예 부재하거나 가끔 과잉으로 존재했다. <발레교습소>가 숨기듯 드러내는 동성애자 캐릭터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현실의 동성애자의 존재 형식에 한 걸음 다가간다. <귀여워>의 잔혹한 어린이 묘사에도 어른들의 어설픈 희망이 아니라 현실의 적나라한 고통으로 존재하는 ‘어떤’ 어린이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솔직함이 배어 있다.

신윤동욱/ <한겨레21>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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