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송년특집] 2004년의 얼굴 - 백윤식 & 문근영
2004-12-23
글 : 박은영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김선생과 어린 신부가 뜬 까닭은?

2004년을 대표하는 두 배우- <범죄의 재구성>의 백윤식과 <어린 신부>의 문근영

<범죄의 재구성>의 김선생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올해 두번이나 수술을 당했다. 그것도 심각한, 뇌수술 수준이었다. ‘어린 신부’ 문근영의 또랑또랑한 눈망울에, ‘김선생’ 백윤식의 서늘한 카리스마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동년배도 라이벌도 아닌 이들을 묶어 말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지만, 2004년의 사건사고를 꼽아볼 때, 이들이 나란히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따져보면, 두 사람은 영화에 전력투구하기 시작한 시점이 비슷하고, 올 하반기에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던 포털 사이트의 얼굴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십대에게 사랑받는 ‘진짜’ 십대 배우, 아버지상이 아닌 중년 배우라는 식으로, 이전 충무로에는 존재하지 않거나 미미했던 영역을 개척하고 입지를 다진 스타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알다시피, 이들은 20대가 아니다. 그리고 이들의 팬들도 20대가 아니다. 대중문화의 주체, 트렌드 리더가 20대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심장한 변화 한가운데 이들이 있다. 문근영은 얼마 전, 광고 브랜드 컨설팅 업체에서 실시한 소비자 설문 조사에서 ‘선호하는 모델’ 1위로 선정됐는데, 이때 10대 남자와 30대 여자의 가장 큰 지지를 얻었다. 이는 13살에서 16살의 로틴세대가 활발한 소비주체 그룹으로 떠올랐음을 알린 <어린 신부>의 폭발적인 흥행(전국 300만 동원)이 예고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귀엽고, 깜찍하고, 해맑고, 똘똘하고, 친근하고, 착실한 이미지로 어필한 문근영의 팬카페에는 ‘근영 누나’를 연호하는 남동생 팬들이 바쁘게 드나들고 있다. 문근영과 동반 상승한 <어린 신부> 이후, <여고생 시집가기> <제니, 주노> 등 비슷한 컨셉의 십대 영화가 줄줄이 제작되는 등 그 여파도 만만치 않았다. 문화연대 문화사회연구소의 이동연 소장은 문근영의 등장을 ‘십대 문화’와 ‘십대 무비스타’의 부활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지목한다. “배우들의 연령이 낮아지고 있고, 대중의 취향도 다양해지고 있다. 70년대 임예진이 있었듯, 청춘스타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선 ‘키덜트’ 문화의 팬덤과 산업, 적극적으로 스타를 발굴하고 개입하는 10대 소비계층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영화에서 실종됐던 하이틴 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문근영이 십대 문화의 포문을 열었다면, 백윤식은 충무로의 캐릭터와 장르 갈증을 채워준 독보적인 중년 배우다. 젊은 시절 지식인과 예술가 캐릭터를 도맡다시피 했던 그는 마흔 넘은 나이에 <서울의 달> <파랑새는 없다>의 포커페이스 사기꾼으로서 ‘웃길 줄도 아는’ 탤런트로 변신했다가, 최근 <지구를 지켜라!>라는 기상천외한 SF(백윤식은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 애니메이션인 줄 알았다고 했다)와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매끈한 스릴러로, 뒤늦게 영화에 진출했다. 이 비범한 영화들을 통해 그가 보여준 것은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린, 중년의 카리스마. 누구의 아버지나 삼촌으로서가 아니라, 젊은 오빠 백윤식에게 열광하는 이들에게, 이번엔 그가 대놓고 물었다. “조인성이하고 나하고, 누가 더 잘생겼냐?” 꽃미남 청춘스타와 맞장뜨겠다는 중년의 자신감에, 젊은이들 여럿 쓰러졌다.

두 배우 다 실제 나이대를 연기, 독창적으로 풀어나가

이들은 영화 속에서 실제 나이대 캐릭터를 맡아, 그 나이의 감성과 경험을 투사하되, 비전형적으로 풀어간다는 공통점도 있다. 고등학생인 문근영은 <장화, 홍련>과 <어린 신부>에서 자기 나이대의 캐릭터를 맡아 연기했다. 어려 보이는 20대 여배우가 아니라 10대 여배우가 또래들의 일상과 감수성을 보여준 것이다. 문근영 자신도 ‘어린 배우’로서의 강점을 인정한다. “인기? 내가 어려서가 아닐까? 다가오기 쉬우니까. 그리고 여성스럽지 않기 때문에 편한 여동생처럼 생각하고 예뻐해주는 것 같다.” 롤리타 콤플렉스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 <어린 신부>는 소녀에게 섹슈얼리티를 부여해서라기보다는 ‘어린’과 ‘신부’ 사이의 묘한 간극에 자리잡은 문근영 특유의 ‘무공해’ 이미지 때문에 더 각광받았던 경우다. <장화, 홍련>의 김지운 감독도 그런 문근영을 가리켜 “대하는 사람의 마음을 정화하는 불가사의한 아이”라고 칭한 바 있다.

나이의 의미가 각별하기론, 백윤식도 마찬가지다. 50대 후반인 백윤식이 연기한 강사장(<지구를 지켜라!>)과 김선생(<범죄의 재구성>)은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여유로운 황혼을 준비하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기업체 사장의 탈을 쓴 외계 행성의 왕자라든가 마지막 한탕의 유혹과 자존심 때문에 몰락하는 전설적인 사기꾼이라든가 하는 식의 캐릭터 반전이 숨어 있었다. 그가 임상수 감독의 신작 <그때 그 사람들>에서 보여줄 캐릭터와 연기도 분명 범상하진 않을 것이다. 이동연 소장은 백윤식의 독특한 입지를 이렇게 정리한다. “백윤식은 TV에서부터 카리스마 넘치면서 코믹한 모습, 그런 이율배반적이고 양면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대개 배우들은 진지한 카리스마를 보이거나 코믹하거나 둘 중 하나이지 이 둘을 섞어내지는 못한다. 그런 독특한 개성을 보여줄 만한 40∼50대 배우가 없었고, 백윤식은 그런 점에서 한국영화의 본격 장르화와 키치적 변화에 적합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즈음 TV에서 영화로 옮겨온 중견 배우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현상에 따라붙는 “중년 배우 전성시대”라는 식의 카피를 백윤식은 사양한다. “나는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왔는데, 그렇게 집단적인 개념으로 묶는 건 적당하지 않다”는 지적은 타당하게 들린다.

어떤 캐릭터든 자기 것으로 소화, 대중의 사랑 받아

백윤식은 캐릭터에 다가가기보다는 자기쪽으로 끌어오는 배우다. “백윤식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만으로 더없는 스펙터클이 된 영화”라며 <범죄의 재구성>을 올해의 영화 중 한편으로 꼽은 허문영 영화평론가는 백윤식의 매력을 이렇게 말한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걸 알고 박신양을 찾으러 다니는 표정, <담백하라>를 립싱크로 부를 때 그의 표정은 호소하지 않는다. 마음속에 지옥을 가진 사람의 얼굴, 무표정하게 살아가다 불쑥 삐져나오는 마음의 풍경이다.” 말하자면, 백윤식에겐 ‘인생을 아는’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건 테크닉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그 무엇, 관록과 연륜의 힘이다. 그런 백윤식의 개성에 기대어 기획된 캐릭터는 영화뿐 아니라 뮤직비디오와 CF로도 나타났다. <담백하라>의 뮤직비디오는 가수 김태욱이 반신반의하는 백윤식에게 비슷한 연배의 해외 뮤지션 스팅과 에릭 클랩튼의 공연 실황을 보여주며 설득한 경우. 이어진 것이 록, 발라드, 랩 등 여러 버전의 립싱크로 소개된 인터넷 포털 사이트 파란의 티저 광고다. 광고를 제작한 제일기획은 “후발주자인 만큼 주목도를 높이려면 돌출을 시도해야 했다. 연배가 있겠지만, 카리스마가 강해서, 젊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고 전한다. 파란닷컴쪽은 이 덕에 “포털 순위 22위에서 6위로 급상승할 수 있었다”며 상당한 광고 효과가 있었다고 일러준다.

문근영 또한 어떤 캐릭터든 ‘문근영화’하는 능력을 발한다. <어린 신부>가 도발적인 ‘로맨스’가 아니라 판타지가 가미된 ‘코미디’로 흘렀고, ‘문근영쇼’로 비쳤던 것은 그런 이유. 지금 촬영 중인 <댄서의 순정>에서 옌볜에서 건너와 세상 물정 잘 모르고, 첫사랑을 예감하며 가슴 떨려 하는 ‘열아홉 순정녀’는 문근영이 아니고는 생각하기 힘든 캐릭터다. 아이처럼 덜 자란 느낌의 귀여운 여자들, 이를테면 과거의 최진실이나 장나라의 계보에 들 수 있겠지만, 그들이 문근영처럼 ‘실제로’ 어리지는 않았다. 언젠가 차태현이 “문근영은 국보로 지정해 보호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는 것처럼, 문근영의 성숙(혹은 오염)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대중은,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이 많은 문근영이 언젠가 넘어야 할 산이다. 당분간은 고3 수험생으로 살겠다는 문근영의 폭탄 선언이 야속하긴 하지만, 자신을 소모하지 않도록 호흡을 고르고,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영민함에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린 문근영과 백윤식이 (각자) 사랑에 빠지는 모습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교복 차림으로 “나는 사랑을 아직 몰라~ 조금 더 기다려~”라고 노래하던 문근영은 얼마 전 외할머니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한다. “나도 사랑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멜로 연기를 제대로 하려면 그런 경험이 중요하지 않을까”라고. 왜 아니겠나. ‘준비된 배우’ 백윤식도 “처절한 사랑 이야기, 멜로를 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비치고 있다. 2004년 전 국민의 여동생이자 막내딸이었던 문근영이 그렇게 예쁘게 성장해 가는 한편으로, ‘중년도 멋지다’는 걸 입증해 보인 백윤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자 하는 욕구로 충천하다. 다시 한번, 김선생 식으로 말하자면, 문근영과 백윤식, 그들과 함께하는 충무로는 지금, 시추에이션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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