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설경구의 영화가 아니라 송해성의 영화! <역도산>
2004-12-29
글 : 심영섭 (평론가)
<파이란>을 잇는 남성멜로 <역도산>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역도산>은 송해성의 영화이다. 많은 사람들이 <역도산>을 설경구의 영화라고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다. <역도산>은 송해성의 영화이다. <파이란>의 속편이며, <반칙왕> 근처에도 가본 일이 없는 레슬링영화, 아니 그 레슬링영화의 가면을 역도산이란 타이거 마스크를 쓰고 나타난 남성영화이다. 한·일 합작. 남북한 동시 영화화. 체중 불리기 경쟁. 역도산은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역사상 가장 비싼 속편영화의 대열에 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왜? 라는 질문이다. 왜 역도산이 실패자이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는 역도산이 실패자인지 그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송해성 감독이 굳이 그를 실패자로 해석하는 이유에 대한 의구심이 포함되어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천황 다음에 역도산, 주소를 안 써도 도착하는 편지의 주인공, 절세미인들을 아내와 정부로 얻고, 수만금의 돈을 벌었으며, 고래등 같은 집에 살면서도 역도산은 감독의 손끝에서 실패자가 되었다. <파이란>의 주인공 국가대표 호구 삼류 양아치 강재와 달리 남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는 실패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죽는다. 강재처럼 뒤로 목을 졸리며, 중국 여자 파이란 대신 이번에는 일본 여자 아야에게서 순결한 사랑을 받으며, <파이란>의 마지막처럼 역시 플래시백으로 자신의 인생의 가장 평화로웠던 한순간이 주는 마지막에 가슴을 치며, 역도산은 죽어간다. 카메라는 여전히 침묵하고. 똑같다. 정말 <파이란>의 플래시백을 보는 것 같아 나는 눈을 비볐다.

적어도 송해성 감독은 역도산이 ‘가짜’ 였다고 말해준다. 역도산은 쇼의 성격을 겸하고 있는 프로레슬링을 진검승부를 겨루는 스포츠라고 주장했고, 조선인이었음에도 일본인이라고 정체성을 속이고, 패배를 약속했던 시합에서 진짜로 상대를 때려눕혔다. 그가 최후까지 약속을 지킨 것은 칸노에게도 아야에게도 조선한테도 일본한테도 아니라, ‘지지 않는다’는 자신과의 신념이었다. 그는 자신과 약속한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해서 죽어간다. 그는 자신에게만은 진짜 사나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죽어간다. 그래서 송해성의 손에서 사각의 링은 정글이라기보다 한뼘의 감옥처럼 느껴진다. 그곳에서 역도산은 마틴 스코시즈의 <분노의 주먹>의 로버트 드 니로처럼 자신을 내던지며 길길이 날뛰는 짐승의 모습이 아니라, 많은 한국의 남성영화에서 나오는 조폭의 모습, 맨손으로 출세의 정점에 오르지만 자신과의 약속에 갇힌 수인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점은 이 영화의 주요한 테마인 ‘도망’이라는 문제를 두고 보아도 그렇다. 역도산은 영화의 맨 처음 고국에서 도망간다. 또한 그는 가짜로 지갑을 훔쳐 도망가서 칸노를 만나고, 스모로 최고가 될 수 없자 이번에는 미국으로 도망간다. 도망은 늘 그에게 야망의 계단을 하나씩 오르게 했지만, 그러나 링은 도망칠 곳이 없는 곳이다(이 점은 일본식 가옥이나 사각의 프레임 안에 시종일관 갇혀 있는 듯한 역도산을 잡는 감독의 미장센 짜기에서도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다). 그리하여 탈출구 없는 폭력이, 링 안의 폭력이 밖으로 끓어넘쳐 현실로 튀어들어갈 때, 역도산은 모든 것을 부숴 버린다. 강재가 연탄재를 짓이길 때, 이자는 스모협회를 때려부수고 자신의 레슬링 상패와 트로피를 내던진다. 이것은 모든 것을 무(無)화시키는 허무의 구멍으로 자신을 밀어넣는 사내의 몸짓이다. 결과 역도산은 세상에 대해 편집증적이 되어간다. 한국의 많은 남성영화의 주인공들처럼 그는 또 실패했다.

송해성은 이 점이 늘 슬프다. 절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의 손에서는 조폭영화도, 스포츠영화도 영웅담도 실패담도 남성 멜로가 되는 경향이 있다. 태도는 절제되어 있고 카메라는 고요하고, 송해성의 폭력은 장현수 감독의 계보를 잇는 어떤 정서적인 분노, 실제의 폭력이 주는 힘보다 훨씬 슬픔이 침윤된 허무의 몸짓으로 허공을 가른다. 아무리 맞아도 풀리지 않는 응혈된 슬픔, 아무리 때려도 허물어지지 않는 분노의 성에 갇힌 쓸쓸한 사내의 초상화.

그렇다면 이 반복의 도돌이표를 송해성 그는 왜 그렇게 돌아서 여러 사람 고생시키며 이야기해야 했을까? 우리의 설경구를 고무줄 체중으로 만들고, 한국 사람이 한국어 자막을 읽으면서 한국영화를 봐야 하고, 전에 없는 뻑적지근한 월드 프리미어를 하면서 이야기를 해야 했을까? ‘나는 외롭다. 인생은 승부다.’ 이 두 마디 하이쿠 같은 짧은 서사에 들어가 있는 수많은 상념과 마초적인 감수성을 생각해볼 때, <역도산>의 무게와 신화의 크기, 역사의 부피를 생각해보았을 때, <역도산>은 웰터급 내지 미들급 선수가 헤비급에서 경기를 벌인 꼴이다. 결정적으로 <역도산>은 새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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