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잘돼가? 무엇이든>, 꼭 보시라, 권하고 싶어졌다.
2004-12-31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올해 나온 단편영화 가운데 상복이 터졌던 작품으로 이경미 감독의 <잘돼가? 무엇이든>이 있다. 여성영화제,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미쟝센단편영화제 등에서 상을 받았다. 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상을 휩쓸었나 싶어 서울독립영화제를 찾았다. 보고나니, 여러분도 기회가 되면 꼭 보시라, 권하고 싶어졌다.

<잘돼가? 무엇이든>은 회사 경리 일을 하는 두 여자, 지영과 희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입사 4개월째인 지영은 먼저 입사한 나이어린 동료 희진이 못마땅하다. 지영이 보기에 희진은 대체 생각이라곤 없는 아이처럼 보인다. 그럴 만도 한 게 희진은 사장이 자신을 신뢰한다는 게 자랑스러워서 사장이 시키는 탈세조작에 열성적이다. 거래처를 반씩 나눠서 세금조작을 하기로 해놓고 몰래 지영의 몫까지 손대는 일도 벌어진다. 사장은 같은 장부에서 더 많은 탈세조작을 한 희진에게 흡족해한다. 그런 희진이 지영에겐 악몽이다. 영화는 둘의 갈등을 폭발 직전까지 몰고간다. 나는 이 영화에서 지영의 화를 돋우는 게 사장이 아니라 희진이라는 게 무척 신선했다. 아마 사장과 지영의 대결구도라면 자본가 대 노동자의 관계라는 일반적 틀에 갇혔겠지만 영화는 노동자 대 노동자(그것도 상사와 부하가 아니라 또래의 동료) 관계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잘돼가? 무엇이든>을 보노라면 정말 밉살스러운 게 뭔지 너무도 생생히 드러난다. 그건 사장의 그릇된 명령에서 즉각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원인제공자가 따로 있지만 정말 미운 건 사장을 위해 헌신하는 희진이다. 이 영화는 권력이 작동하는 섬세한 메커니즘을 제대로 그리고 있다.

<잘돼가? 무엇이든>은 아녜스 자우이의 <룩 앳 미>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룩 앳 미> 역시 권력이 작동하는 미시적 질서를 포착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번호에 김혜리 기자가 쓴 대로 <룩 앳 미>에서 권력은 타인의 인내와 관용의 폭을 결정한다. 권력이 갖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그려내는 이런 유의 영화로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도 빼놓을 수 없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주인공 원상은 여자를 사로잡는 중년 남자의 힘에 처음엔 분노하지만 차츰 매혹된다. 세 영화의 감독이 모두 여자라는 사실이 우연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여자의 눈이 아니면 포착하지 못할 뛰어난 관찰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소한 습관 하나도 놓치지 않는 예민한 촉각과 더불어 세 영화의 공통점은 권력이 자발적 동의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그린 점이다. 명령이나 강요, 협박과 회유가 아니라 스스로 권력을 떠받들게 만드는 인간의 심리, 그걸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일은 보석 세공술 못지않게 정밀한 작업이다. <잘돼가? 무엇이든>이 단편에서 그걸 해낸 걸 보면 장편 데뷔작에도 기대를 갖게 된다.

이번호에선 올해의 얼굴로 백윤식과 문근영을 만나봤다. 그들이 올해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배우, 라고 단정하면 이견이 적지 않겠지만, 2004년을 대표하는 두 배우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지난날 안성기, 문성근의 시대가 있었고 한석규의 시대가 있었으며 최근 몇년이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의 시대라고 하지만, 한국영화는 지금 그들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한없이 맑고 밝은 문근영과 세월의 흔적을 카리스마로 승화시킨 백윤식은 지금 한국영화가 수용할 수 있는 스타 사이클의 양 극점처럼 보인다. 두 사람 외에 수많은 배우가 있지만 백윤식과 문근영은 두 극단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그리고 극과 극의 간격이 넓을수록 우리는 더 다양한 영화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PS. 지난 482호 표지 제목 “김기덕·박찬욱/ <역도산>을 말한다”가 적지 않은 혼돈을 낳았다. “두 감독이 <역도산>에 대해 말하는 줄 알았다”는 반응을 접하고 당혹스러웠다. 세 평론가의 대담 주제를 나열한 것인데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예상을 못했다(주제 순서대로는 <역도산>·김기덕·박찬욱 순이었으나 미관상 순서를 바꿨더니 오해가 생겼다). 아무쪼록 널리 양해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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