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더이상 나쁜 남자는 없다! <빈 집>
2005-01-05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김기덕의 비판자였던 영화평론가 김소영이 <빈 집>을 지지하는 이유

내가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대해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나쁜 남자>는 가히, 특히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한국 영화사에서 여러 가지 판본으로 재현의 소진에 이를 만큼 생산되어온 주변부 남성의 외상이, 남성의 것이라는 특수 면책을 누리면서 여성을 성기로 환원시키는 극단적 예로 보였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의 <빈 집>에서 이승연은 <나쁜 남자>의 여대생 선화의 이름으로 다시 불린다. <빈 집>에 드리운 <나쁜 남자>의 그림자가 어디 그 이름뿐일까? 나를 포함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나쁜 남자> 이후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을 멈추었다. 그러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그 젠더화된 외상이 빚어내는 폭력적 환원의 악순환은 일단 유예된 것으로 보인다. 이 유예 속에서 <사마리아>의 형사인 아버지는 원조교제를 한 딸의 상대를 죽인 손으로, 딸이 운전연습을 할 수 있도록 시냇가의 돌들을 노랗게 채색한다. 그녀의 길을 열어주려 한다. <빈 집>에서 떠돌이 태석(재희)은 매맞는 아내 선화(이승연)의 가출을 돕는다. 그렇다면 여성 성기 환원주의에서 이젠 그 동전의 양면인 구출 판타지로 가고 있는 것일까? 다행히도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그 판타지만을 갖고 있지는 않다. 이제 <빈 집> 앞에서 <나쁜 남자>를 기억하며, 그러니 만감이 교차하는 작은 글을 쓴다.

유령연습이 아닌 그림자연습을 하는 태식

(빈)집이 있다. 그리고 여자들의 오랜 말이 있다. ‘생각해보니 난 그림자로 살았구나.’ 사실 그녀는 가부장의 그늘 밑에서 산 것이며, 기실 그림자도 아닌 그늘이다. 한편, 장자의 유명한 우화에서 어떤 남자는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싫어한 나머지 그림자를 떨쳐내려고 힘을 다해 달리다 죽는다. 장자는 말한다. “만일 그가 단순히 그늘 속으로만 걸어들어갔어도 그의 그림자는 사라졌을 것이다.” 이 남자는 자신의 그림자를 못 견디고 죽은 것이다. 반면 <빈 집>의 종반부에서 태석은 감옥에서 그림자가 되는 훈련을 한다. 감옥의 교도관(혹은 감독 자신의 인터뷰 등에서)은 그것을 유령연습으로 부른다. 그러나 태석은 유령이 된 것이 아니다. 교도관은 태석의 훈련을 오인한 것이다. 유령은 죽음에서 돌아와(revenant), 출몰을 즐겨하는 반면 여기서 태석은 그림자 같은 존재로 변한다. <빈 집>은 유령론(hauntology)의 대상이 아니며, 유령의 출몰 장소가 아니라 그림자의 장이다. 그림자의 존재론이다.

그렇다면 감옥에서 그가 훈련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인간의 가시계 180도(영화에서 설정된)를 벗어난 범위에 자신을 위치시켜 상대방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거기서 더 큰 도전은 자신의 그림자까지도 지워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면서, 동시에 자신의 그림자까지 지워야 하는 이중부정의 과정을 거쳐, 이후의 다른 존재를 생성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태석이 형상화하고 모방해본 것은 새다. 새의 깃털 같은 가벼움을 흉내내는 것인지, 비상을 꿈꾸는 것인지, 무엇을 모방하는 것인지는 이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태석의 발현은 새의 날갯짓에 가까울망정 유령이나 귀신의 출몰과는 다르다. 그래서 이 훈련은 유령연습이라기보다는 타자의 그림자로 되고 자신의 흔적, 그림자를 지우며 동시에 사랑하는 대상이 인지하고 느낄 수 있는 존재로 변모하는 삼중의 되어가기다. 이 훈련장면은 <빈 집>을 대사없이 액션과 뉘앙스만으로 구성하려 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무협액션영화에서 걸출한 협객이 불현듯 만들어내는 물리나 산술로는 불가능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태석은 사람들의 시계 외부에서 행동하는 법을 발견한다. 이 궤적은 판타스틱하다. 판타스틱 양식이 가시계와 비가시계의 문지방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다고 할 때 <빈 집>은 감옥장면부터 이 문지방 위에 올라서 판타스틱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영화는 당연하게도 장자의 예의 호접지몽,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로 끝난다. 영화에 사용된 부분을 이상을 조금 더 인용하자면 그 ‘제물론’의 한 소절에서 그늘이 그림자에게 묻는다. ‘조금 전 그대는 걷더니 이제는 멈추고 전에는 앉아 있다가 지금은 일어나는구나. 왜 그리 지조가 없는가?’ 이에 대해 그림자는 그림자란 결국 다른 이에 기대고 있는 것이며, 또 다른 이들도 무엇인가 다른 것에 기대고 있고 그 이치란 뱀과 매미가 허물을 벗는 것과도 같다고 설명한다.

이 인용으로 보자면 위에서 이중부정의 과정이라고 설명한 부분은, 부정이라기보다는 허물을 벗어 새로운 것으로 태어나는 과정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림자의 존재 법칙을 빗대 사유해볼 수 있는 공존의 양태다. 선화에 기댄 태석, 태석에 기댄 선화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본체와 그림자 그리고 다시 그것이 자리바꿈하여 그림자와 본체로 짝이 되고, 상호교환 가능하며 기대게 된다는 것이다. 수천수만개의 짝들로 이루어지는 이 짝패들은 기대어 있기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게도 되고 상하게도 하고 죽이게도 된다. 물론 선화와 태석은 사랑의 짝이지만, 선화와 그녀의 남편 또 영화 속 남녀 짝들은 적대적이거나 애착, 애증에 차 있다. 이 와중에 이 영화의 영어제목인 3번째 골프채, 그 아이언으로 태석이 연습 삼아 날린 공은 차 안에 앉아 있던 연인 중 한 사람을 죽게 한다. 무작위적이고 우발적인 비극이다. 아이언은 계급적 지표도 되고 무기로도 기능한다. 아이언이 날리는 골프공은 본체와 그림자라는 관계를 중재하거나 매듭짓거나 파괴한다. 아이언과 공은 그림자와 본체의 숨바꼭질 속, 불가피하고 난폭한 매개 이물질이다.

이 영화의 미니멀한 사물의 운용 속에서 영화의 소도구들은 자칫하면 하나하나가 과잉 의미를 띠게 되는데, 아이언과 겨눌 만한 또 다른 한축은 영화에서 사용된 이승연의 누드 사진이다. 나는 이승연이라는 배우의 등장은 효과적이라기보다는 문제적이며 지나치게 자명하거나 원인-효과의 연쇄 기능이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매맞는 아내 선화와 종군위안부 관련 사진집 문제로 사회적 테러를 당한 이승연 사이의 지시적 유사성은 매우 박약하다(후자는 이승연 자신이 원인 제공자와 잠재적 이윤 수취자라는 점에서).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서 본체와 그림자 사이의 공명이 가장 약한 것이 선화와 그녀의 누드 사진이다.

태석의 그림자 훈련이 한편으로는 복수를 이루는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선화 남편의 집에서 그녀와 동거하기 위한 것으로 이어진다면, 태석의 등장 이후 그녀에게 일어난 변화는 모호하다. 태석이 액션영화의 장르적 코드를 전유해 새로운 존재가 된다면, 선화에겐 그 전유의 힘이 없다. 혹자는 이 영화를 선화의 판타지- 매맞는 아내가 처하게 된 끔찍한 수동성은 누군가 문을 따고 들어와 자신을 구출해주기를 소망한다- 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사실 종영 뒤, 유사-페미니즘의 소망 충족 시나리오라는 사후적 재구성이 아니라면 이 영화에서 그것을 가리키는 시선이나 서사의 구조는 찾기 힘들다. <빈 집>은 거의 전적으로 태석의 판타스틱한 세계로의 진입이다. 다만 태석을 통해 형상화되는 개념 작업이 젠더 형상화 작업에 유추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많아 이 영화가 반페미니즘적 텍스트는 아니라는 것이다. 유추하는 바가 많다고 하는 것은 태석의 그림자 생성이 한편으로는 위 장자에서 인용된 자신의 그림자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린 남자의 본체 중심주의적 태도와 다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림자도 생산하지 못한 채 그늘에 가려진 여자의 삶의 양태와도 다르기 때문이다.

태식의 기생은 착취가 아닌 공생이며 활력소

말하자면 태석의 삶의 양태는 주변적 이성애 남성이 여성을 성기로 환원시키지 않고 그녀와 공존하는 마이너 모드의 개념화와 형상화라는 것이다. <빈 집>은 판타스틱의 세계로 들어서는 순간 개념성과 추상성이 높아져 현실에서 그럼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문으로 만들어버린다. 이제 마이너 모드의 그림자 존재론과 공존의 문제를 영화가 내재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장자의 코드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보면, 미셸 세르는 기생론에서 불어로 파라지트(parasite)가 기생충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식탁을 즐겁게 해주는 식객, 손님이며 소음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서로 유사성이 없어 보이는 의미들이지만 이들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주요한 동일 기능은 이들이 열을 발생시키건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건 간에 일종의 열 자극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생과 숙주의 관계는 숙주의 관점이 아니라 그 관계성으로 본다면 사실은 모든 숙주가 무엇인가의 기생물이기 때문에 기생의 방식은 “에잇! 이 사회적 기생충 같은…’이 함의하는 통상적 의미를 띠지 않는다. <빈 집> 전반부에서 태식의 삶의 방식은 집 주인들과 경찰에 의해 위의 미셸 세르적 의미가 아니라 사법적 의미에서의 사회적 기생충으로 오인된다. 그러나 태식의 일련의 행위들은 이러한 기생 방식을 다른 삶의 양태로 이해하게 만들며, 바로 이것의 개념화의 근거가 미셸 세르의 기생론이다. 누군가는 태식의 삶의 방식을 들뢰즈적 노마드로 이해할 수 있지만, 태식이 결과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숙주에 기생하는 삶이다.

그러나 그 방식은 숙주를 착취하는 기생이 아니라 공생이다. 결국 선화의 빈집에서 누가 숙주이고 누가 기생물인지는 무엇이 꿈이고 현실인지, 본체인지 그림자인지의 경계가 흐려진 것처럼 어렴풋하다. 선화의 아침 식탁의 식객으로 태식이 남편 뒤에 그림자로 서서 즐겁게 밥을 먹을 때 우리는 그의 기생이 선화의 삶을 활달하게 만들고 자극하는 것을 본다. 사회의 소음이고 얼룩이고 기생물이며 그림자인 태식이 나쁜 남자가 아닌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 태어나는 비껴간(para) 장소(site)로서의 <빈 집>의 탄생이다. 그래서 빈집은 장소(site) 그 이상(para-beyond)의 개념적 공간이다. 아, 정말 만감이 교차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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