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산>의 관객은 울지 않는다. 눈물 자위를 닦는 대신 뭔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극장문을 나선다.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뭔지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단일 민족의 단순 사고에 <역도산>은 너무 어렵다.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의 영웅이 되었던 사람의 이야기”만으로도 머리가 지끈한데, “난 일본이고 조선이고 그런 거 몰라. 난 역도산이고 난 세계인이다”라고 외치는 사나이의 내면세계를 이해할 ‘조선인’은 흔치 않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도 <역도산>처럼 민족의 아픈 추억을 불러낸다. <태극기…>와 <실미도>는 <역도산>과 달리 1천만 관객의 눈물을 짜내는 데 성공했다. ‘다행히’ 영화관 밖에 아픈 추억을 극복한 덜 아픈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이 그들을 위무하므로, 관객은 마음껏 눈물을 흘린다(<태극기…>, 북과 체제경쟁에서 승리한 남한의 현실). 아련한 감상에 젖는다(<실미도>, 군사독재에서 벗어난 남한의 오늘). 그것은 어쩌면 악어새의 눈물이다. 출세한 자가 고향으로 돌아가 잔치를 벌이면서 터뜨리는 울음 말이다. 그 눈물에는 슬픔보다는 자긍심이 배어 있다. <태극기…>와 <실미도>는 지난 역사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일종의 스크린 속의 과거청산이었고, 어설픈 씻김굿이었던 셈이다. 1천만 관객의 눈물에 씻겨서 과거는 손쉽게 지워졌다.
민족적 영웅을 보려는 관객의 기대를 깬다
한국인은 <역도산>에 열광할(혹은 통곡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아직 ‘극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상처는 현재형으로 남아 있다. 역도산은 “성공하자, 성공하면 웃을 수 있다. 아니 웃으려면 성공하자”고 말하지만, 한국인은 “극일하자, 극일하면 울 수 있다. 울려면 극일하자”고 생각한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피해자로서 통곡하는 민족주의다. 촛불집회의 흥행성공은 피해자의 드라마를 훌륭하게 완성했기 때문이다. <역도산>은 촛불집회의 정서를 자극하지 못한다. 영화 초반부에 슬쩍 조선인 피해자로 묘사되다가 갑자기 일본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스스로 세계인이라고 선언하는 역도산에게 한국 관객이 감정이입을 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대한민국의 대표 영웅이자, 일제 식민주의의 대표 피해자, 역도산을 보고 싶었던 관객의 기대는 산산이 깨어진다.
역도산은 쪽발이의 뒷다마조차 까지 않는다. 뒷다마는커녕 본명선언도 하지 않는다. 관객은 역도산에게 비록 공개적인 커밍아웃하지는 않았더라도, 링 뒤에서는 북(이든 남이든)의 정권에 돈도 좀 보내고 일본놈들도 적당히 무시하는 ‘조선인’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도산은 민족을 부인하고 개인행동을 일삼는 개인주의자다. 본명선언을 권유하는 친구에게 “조선이 나한테 해준 게 뭔데”라고 묻는 개인주의자를 동정할 한국인은 더욱 적다. 역도산이 민족에게 등을 돌리는 순간, 관객은 역도산에게 등을 돌린다.
대한민국은 개인주의자에게 ‘동정없는 세상’이다. 역도산은 <태극기…>의 주인공처럼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지도 않고, <실미도>의 주인공들처럼 체제에 희생당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키워준 후원자를 배신하고, 자신에게 순정을 바치는 여인을 버린다. 대의명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다. 그의 슬로건은 “딱 한번 사는 인생, 착한 척할 시간이 어디 있냐”다. 역도산은 자신의 욕망에 휘둘리다가 자멸의 길로 빠져든다. 자신의 욕망을 민족의 재단에 바칠 수 없었던 불운한 사나이는 프로레슬링을 통해 세계를 만나지만,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이 되지도 못한다. 영화에서 세계인 역도산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미국에 다녀온 역도산은 아야에게 “하루종일 자동차로 달려도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풍경, 그것이 자신의 가슴으로 들어왔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나도 모르겠다”고 덧붙인다. 영화 <역도산>은 그것이 무엇인지 끝까지 보여주지 못한다. 역도산은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에서 탈피해 미국, 유럽 여러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할 뿐, 동도서기(東道西器 : 서구적 기술과 아시아적 가치를 새롭게 접목시키다 )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은 동아시아 근대사의 한계이자 비극이기도 하다.
민족적 정체성을 해체하나 재구성하지 않는다
영화는 계속해서 딜레마에 시달린다. 그가 “세계인의 스포츠로 인종과 국적을 안 가립니다”라고 이야기했던 프로레슬링은 일본 민족주의의 자긍심을 회복하는 도구로 쓰인다. 그는 일본 영웅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적극적으로 일본 민족주의에 부역한다. 그렇다고 링 아래의 ‘인간’ 역도산이 세계인으로 설득력 있게 그려지는 것도 아니다. 역도산에게서는 노마드의 자유도, 디아스포라의 쓸쓸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사나이가 있을 뿐이다. 그의 세계인으로서 정체성은 기껏 “양약만 믿는다”는 말로, 양약을 입에 털어넣는 행위로 추락한다. 역도산이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그저 해체하기만 할 뿐 재구성하는 인물로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허문영 영화평론가는 지난호 <씨네21> 대담에서 “한국영화에서 민족주의의 감성에서 벗어난 남성 영웅을 그릴 때의 난관이 아직 있는 게 아닐까 싶다”고 지적했다. 바로 그것이다.
<역도산>은 통속적인 민족주의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찾지 못하고 서성인다. 그것은 단순히 영화 <역도산>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직 현해탄도 건너 본 적이 없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현해탄을 넘어 태평양까지 횡단했던 사나이의 운명을 제대로 다루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도산>은 현해탄과 태평양 사이, 그 어디쯤 어정쩡하게 서 있다. 동아시아의 근대사 어딘가에서 서성이고 있다.
추신 l 지난 12월 수원 삼성의 브라질 ‘용병’ 축구선수로는 처음으로 나드손(22)이 시즌 최우수 선수상(MVP)을 탔다는 기사를 봤다. 그 기사를 본 순간 나는 ‘나드손이 굉장히 잘했나보다’ 하는 생각에 앞서 ‘정말 이번 시즌에는 한국 선수들이 못했나보다’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용병’이 최우수상을 타는 일은 역도산이 스모의 최고등급인 ‘요코즈나’로 승급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예컨대 한국 프로농구에서 외국인 선수들이 경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0%가 넘는다. 해마다 득점, 리바운드 1위를 석권함은 물론이고 득점, 리바운드 랭킹 10위 안에 외국인 선수가 7∼8명은 된다. 하지만 외국인 선수가 최우수 선수상을 받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프로야구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반세기 전 역도산의 현실은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현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