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정이현의 해석남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
2005-01-07
글 : 정이현 (소설가)
한없는 사랑으로 남자와 세계를 구원하는…정말 있다면 말리고 싶다

결핍이 있는 매력남은 여자의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그래서일까. 위험한 남자에게 유독 끌리는 여자들이 있다. 즉, 어떤 여자들은 ‘뭔가 비밀이 많으며, 하는 일이 베일에 쌓여있고, 과거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는 암시를 풍기며, 헤어스타일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난장판인 집안을 절대로 청소하지 않는’ 부류의 남자를 좋아한다. 소피의 경우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마법사 하울은 보기 드문 미청년이 아닌가. 더욱이 소피는 아줌마들만 득시글거리는 모자가게에 콕 틀어박혀 살던 소녀였다. 위험에 처한 순간에 흑기사처럼 등장해 자신을 구해내고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멋진 경험까지 맛보게 해준 젊은 꽃미남에게 마음을 뺏겨버린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더구나 그 남자, 하늘을 나는 내내 소피의 두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마법에 걸려 졸지에 파파할머니로 변한 소피는 마법을 풀기 위해 산 넘고 물 건너 하울의 집을 찾아간다. 그러나 막상 그를 마주 대하고는 자신이 그때 그 소녀였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생뚱맞게 무보수 가정부로 들어앉는다. 허리도 잘 펴지 못하는 몸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며 먼지투성이 실내를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고, 시장을 보고, 아궁이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다. ‘왜 내가 이걸 해야 하지?’ 라는 불경한 의문 따위는 품지 않은 채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의 모든 재생산 노동을 수고로이 전담하는 것이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행하는 가사노동의 고귀한 가치를 폄하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기껏 힘들게 욕실 청소를 해줬더니 뭘 잘못 건드렸냐며 도리어 팔팔 뛰는 남자를 위해서라면, 일방적인 희생은 애 저녁에 관두는 게 낫다는 게 내 견해다. 살면서 억장 무너질 일, 부지기수일 테니.

밖에서 힘들게 싸우고 들어오는 남자-집안일을 하면서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능청맞지만 귀여운 사내아이-치매할머니-애완견’ 으로 이루어진 하울 성의 구성원들은 그럴싸한 ‘유사 가족’이다. 움직이는 성은 일견 이주와 유목의 상상력의 산물인 듯 보이지만 사실 그 안의 사람들은 기능적 성역할 분담에 충실한, 이를테면 퍽 농경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 소피는 하울의 연인일 뿐 아니라 ‘엄마’로서의 임무까지 맡아, 하해와 같이 무한한 사랑으로 그를 지켜주어야 한다. 나아가 그 뜨거운 사랑으로 세상을 감읍시켜 전쟁을 멈추게 하고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해야 한다. 아, 그러니 소녀는 위험한 남자 하울을 사랑한 순간 그를 구원했을 뿐더러 ‘사랑과 돌봄의 윤리’로 전 세계를 구원한 것이다. 혹시라도 이런 거대한 이상을 품고서, 불우한 눈빛을 가진 남자에게 접근하는 제 2의 소피가 현실에 있다면? 미안하지만 나는 일단 뜯어 말리고 보겠다. 차라리 그 대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변함없이 소피 곁을 지켜주고 묵묵히 궂은일을 해결해준 무대가리 허수아비에게 한 표를 던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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