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수첩을 보지 않으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수첩을 뒤적이는 그는 안타깝다는 눈으로 바라보더군요. 아무 말 없이 그는 한참을 걸었습니다. 언젠가 그가 집 앞까지 데려다 주면서 했던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잠시 그해 겨울을 떠올리다가 아차 싶었습니다. 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고 그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스치듯이 한 약속이었는데….
인우(이병헌)는 태희(이은주)를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그의 눈은 언제나 그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걸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그녀에게 저돌적으로 다가섰습니다. 표피적으로는 그가 찾아온 것이지만 그녀도 그를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쉬운 사람이라 여겨질까 조심스러웠던 거지요. 사랑을 얻고, 확인하고 서로의 존재에 대해 만족스러워질 때…, 영원을 꿈꾸던 그 여자는 그를 떠나게 됩니다. 그는 그녀를 마음속에 묻었습니다.
2월22일은 우리가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습니다. 앞으로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되든 1년에 하루는 함께 보내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1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저는 말끔히 잊었으니까요.
현빈의 작은 습관 하나하나 그 여자가 돌아온 것입니다
1년 전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평소에도 여럿이 잘 어울려 다니던 그저 친한 친구. 딱히 눈에 띄지도 않고 그렇다고 둘이 만날 정도로 가깝지도 않은 그런 친구였습니다. 언제나 그는 바라보고 있었는데 제가 그 시선을 의식하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그는 저를 알아보았고 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인우는 현빈(여현수)을 한번에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된 그가 현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담임으로서 그 아이가 궁금했던 거겠지요.
하지만 현빈이 던지는 질문, 손가락을 말아올리는 작은 습관, 지니고 있는 라이터. 병헌은 믿을 수가 없었지만 그 여자가 돌아온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인우는 현빈 속에 있는 그 여자를 알아보았지만 현빈은 인우를 잊었더군요. 사실 인우도 그 여자를 잊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을 겁니다. 그 여자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야 하는 나날들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여자를 잊었다고 그 여자는 떠났다고 최면을 걸며 살아남았을 겁니다. 그러나 현빈을 보며 그 여자가 되살아난 것이지요. 최면상태가 풀린 겁니다. 이제 다시 그 여자를 잃을 수는 없는 그런 절박함이 그를 저돌적으로 만들었고 현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저도 당황했습니다. 그는 저를 알아보았다고 했지만 저는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제 세계로 한발짝 들어오려고 하는 그를 내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친구에게 냉정하게 대하기는 싫었지만 오히려 그런 편이 그에게도 저에게도 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끝까지 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제가 살고 있는 근처를 지날 때면 가슴 한쪽이 뻐근해진다고 했습니다. 너무 쉽게 그의 진심을 묻어버린 제 자신이 가볍게 느껴져서 싫었습니다.
현빈도 인우를 기억해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둘은 세상을 버리고 떠납니다. 번지점프를 하는 둘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습니다. 세상으로 이어지는 끈을 잘라 버리고 두 연인은 새로운 세상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하지 않는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에 가슴 묵직해지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해피엔드로 끝맺는 그들의 결단이 대견해 보였습니다. 서로를 알아보고 그 사랑을 지켜내는 연인들이 얼마나 될지. 간절히 원한다면 그런 사랑이 제게도 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