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그때 그사람들>은 어떤 영화?
2005-01-28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사진 : 윤운식 (한겨레 기자)
허둥지둥…우왕좌왕… 부조리 향해 ‘탕탕탕’

영화 <그때 그사람들>을 꿰뚫는 하나의 열쇠말은 ‘부조리’일 것이다. 개봉 전 논란이 됐던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묘사뿐 아니라 최고 권력자에게 총을 겨누는 사람이 총이 고장나 허둥대는 모습, 무슨 일이 진행되는지도 모르면서 지시에 따르며 우왕좌왕하는 부하들, 혼란 속에서 엉클어지기는 마찬가지인 각료들 등 대부분의 장면에는 비장하고 절박한 분위기가 황당한 행동, 우스꽝스러운 대사들과 충돌한다. 특정 장면과 대사들이 ‘허구’임을 감안해도, 이야기의 뼈대인 ‘사실’을 통해 관객은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한 순간이 얼마나 부조리하게 흘러갔는가를 목도한다. 결국 영화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관객에게 남는 건 짧지 않았던 한 시대의 지독한 부조리함이다.

<그때 그사람들>은 1979년 10월26일 오후부터 다음날 아침까지를 그린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조용하게 시작된 이날, 궁정동 안가의 연회 도중에 중앙정보부의 김 부장(백윤식)이 거사를 결심하고 거기에 부하 주 과장(한석규)과 민 대령(김응수)이 동참하면서 안가는 순식간에 긴장감에 휩싸인다. 그 거사에 중정의 경비원, 운전 기사까지 차출된다.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 있었음에도 영문을 모른 채 완벽하게 소외되어 있던, 그리고 소리없이 형장에서 사라져간 ‘그때 그사람들’이다. 이들의 혼란스러움은 연회장 방 안의 나른한 분위기와 대비되면서 이날 밤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급박함으로, 다시 처참함으로 연결시키는 연출 감각과 기술적 완성도는 보기 드물게 뛰어나다. 카메라는 주요 가담자인 세 인물 뿐 아니라 ‘도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이 각기 처한 두려움을 한치의 빈틈 없이 담아내며 총성이 울린 순간 여러 장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급작스러운 움직임을 기민하면서도 유려하게 따라간다. 이 와중에 총이 고장난 김 부장이 마당으로 뛰어나오며 “총 어딨어, 총 가져와” 소리를 지르는 장면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유발하며 영화를 단순한 장르적 즐거움에서 한 단계 끌어 올린다.

<그때 그사람들>은 역사적 사건을 다룬 다른 영화들과 다른 독특한 어법을 선보인다. 누구를 편들지 않고, 이렇다할 재해석을 내리지 않으며, 김재규가 왜 그렇게 대책없이 일을 저질렀는지는 의문부호로 남겨놓는다. 쿨한 연출 속에 사람들이 죽이고 죽어가는 모습을 비추면서 아이러니를 증폭시킨다. 한바탕 총싸움이 오간 뒤, 연회장에 참석했던 두 여자가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그제서야 운다. 그 눈물을 통해 비상식이 난무하던 그곳에서 관객은 처음으로 상식과 만난다. 우는 일 외에 상식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던 어처구니 없는 일이 권부의 중심에서 벌어졌음을 새삼 상기시키면서, 풍자극의 외형을 쓰고 출발한 영화는 기어이 관객의 자괴감을 끌어낸다. 재해석과 가공을 통해 역사적 사건에서 납득되지 않는 부분에 인과관계를 채워넣지 않고, 거꾸로 납득되지 않는 그 부분에 주목하고서 아이러니를 극대화시킨다. 전형적인 역사물에 익숙한 이들에겐 낯설 수도 있지만, <그때 그사람들>은 소재의 무게에 짓눌려 현대사에 접근하지 못해온 한국 영화계에서 의미있는 성취를 이뤄낸다.

임상수 감독의 말말말

“어떤 주장도 없다 실체를 보여줄 뿐”

지난 24일 시사회를 통해 <그때 그사람들>이 공개된 뒤 임상수 감독은 각종 매체와의 인터뷰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다. <뉴스위크>도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바쁜 틈을 비집고 들어가 25일 그를 만났다.

-이 영화에 따르면 10·26은 참 어처구니가 없이 진행된 사건이다. 어처구니 없었던 역사를 드러내려는 게 의도인가, 아니면 역사를 그렇게 어처구니 없이 정리해놓고 살아왔다는 걸 드러내려는 것인가.

=둘 다다. 박 대통령 사체가 놓인 병원에 총리와 장관들이 다 몰려갔을 때, 한 장관이 사체의 국부에 모자를 씌우는 장면을 두고 논란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때 그 방은 국가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다 모인, 국가 그 자체였다. 국가가 그렇게 허둥지둥댔다는 거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는 반성이나 자괴감, 혹은 결의 같은 걸 담은 거다. 당시 권력에 대한 비판이기보다 그 실체를 보여주자는 거다.

부시도 노무현도 풍자·조롱하는데 박정희는 신주단지 모시듯 해야 하나

-현대사의 사건을 다룰 땐 전형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5·18 같은 사건이 대표적이다. 10·26은 사건 성격이 좀 다르지만 그래도 그 상황을 직시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전형적 인물을 집어넣든가, 대안의 가능성을 비춘다든가 해야 한다는 부담 같은 게 있었을 법한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말하는 건가? 나는 그런 것에 관심없다. 촌스러운 미학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꼭 미학적으로 어떠하다기보다 나는 다만 소통하고 이해시키는 데 어떤 방식이 가장 효과적인가를 고민할 뿐이다. 나는 영화에서 어떤 주장도 하기보다 그 역사의 실체를 보여주려고 했다. 거기에 장르 영화의 틀을 끌어온 거다. 나는 거기까지다. 내가 생각하는 걸 자기검열 없이 일사천리로 한 영화라는 점에서 기분 좋은 영화다.

-김재규와 그 부하들을 객관적으로 그리는 듯하다가 영화 말미의 내레이션은 그들을 비꼰다.

=이 영화는 마초들의 사고방식으로 흘러가는 진짜 남성영화다. 군사문화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남자들의 정신상황으로 일관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앞뒤의 나레이션은 여자들에게 맡겼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건 궁정동 안가에 남아있었던 두 명의 여자들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박흥주(영화 속 민 대령)의 청렴했던 개인사를 알고서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내레이션은 그를 ‘철딱서니 없다’고 표현한다. 총으로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남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말하고 싶었다.

-끝부분에 박 대통령의 장례식 장면이 다큐멘터리로 삽입됐는데, 이걸 두고 박정희와 박근혜에 대한 배려다, 조롱이다 등등 상반된 말이 많이 나온다.

=다큐멘타리 삽입은 나름대로 야심적 설정이었다. 이렇게 죽은 사람을 두고, 사람들이 이렇게 슬퍼했다는 거다. 이렇게 죽은 사람인데 이렇게 슬퍼한다 그런 느낌, 우리를, 이 영화를 대상화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할까. 물론 어떻게 보여지느냐의 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그리고 그 텔레비전 화면은 내가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장례식 때 김수환 추기경이 “여기 주님 앞에 인간 박정희가 놓여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라고 부른 건 추기경 뿐이었다. 부시든, 노무현이든 자유롭게 풍자하고 조롱하고 사는데 박정희라고 신주단지 모시듯 해야 하는가. 그를 땅에 내려놓자, 그런 생각이었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국회의원의 반응 가운데 ‘등장인물들을 너무 희화화했다’는 게 있는데.

등장인물들 너무 희화화했다고? 관습 뛰어넘은 리얼리즘이겠지

=시나리오 감수를 한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한테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에서 주인공이 말하는 자신의 칼싸움 장면은 대단히 멋있지만 옆에서 그 장면을 본 나뭇꾼의 말을 빌어 다시 그려질 때는 주인공이 두려움에 덜덜 떨며 개싸움을 한다. 그게 희화화라면 내 영화도 희화화일 수 있겠지만, 구로사와의 그런 묘사가 관습을 탈피해 새로운 리얼리즘을 탄생시켰다. <그때 그사람들>도 그 전통에 있고, 그래서 희화화가 아니라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전작들처럼 이 영화에도 냉소가 있다. 냉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냉소적이라기보다 센티멘털리즘에 빠지고 싶지 않은 거다. 나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중 중요하게 여기지만 거짓에 속는 자기기만적인 연민은 싫다. 그런 건 오래 지속되지 않고 배신감만 안겨준다. 그걸 냉소라고 한다면 냉소가 하나의 방법론이고 힘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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