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잊고 싶은 기억들이 너무 많다. 누군가 더 이상 말 붙일 수 없는 다른 세계로 떠나버렸을 때의 그 무력함, 제대로 피지도 못한 채 저물어 갔던 어떤 연애를 둘러싼 상실감. 사실 이런 일들이 닥쳤을 때는 너무 아팠다. 그냥 ‘가슴이 아파요’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고통이 느껴졌다. <맨 인 블랙>의 윌 스미스에게 제발 이레이저 총 한번만 쏴달라고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가 그들과 그 사건들을 다시는 마주치지 않도록 모든 걸 바꿔 놓고 싶었다. 그땐 정말 그랬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롭게 기억해야 할 것들이 생겨나다 보면, 그 죽을 것 같았던 아픈 기억들마저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잠시 안심을 한다. 휴~ 이제는 괜찮아 졌구나. 정말 괜찮아 졌구나. 그러다 불쑥 사소한 말 한마디에, 무심코 돌아본 누군가의 뒷모습에, 스쳐가는 체취에 깜짝 놀라 잠시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런 경험,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대부분의 기억에겐 시간이 약이지만, 어떤 기억들은 뇌가 아니라 뼈 속에 아로새겨져 시간의 흐름과 상관 없이 명징한 자국을 남긴다.
여기 <이터널 션샤인>이란 영화가 있다. (한국 개봉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니 스포일러성 글은 자제하겠습니다) 평생을 그다지 충동적이지 않게 살아왔던 남자 조엘(짐 캐리)과 충동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온 여자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의 사랑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한 때 사랑을 했고, 그리고 대부분의 연애의 끝이 그렇듯 지리멸렬하게 헤어졌다. 그리고 이제 두 사람은 그 고통스런 실연의 기억을 지우려 한다.
2004년 미국에서 개봉해 가장 따뜻한 찬사를 이끌어 냈던 이 영화는 (지난 골든 글로브에서 크게 인정 받지 못한 점은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뷔욕이나 벡등의 뮤직비디오에서 엉뚱하고 허를 찌르는 상상력을 보여주었던 감독 미쉘 공드리와 <존 말코비치 되기> <어댑테이션> 같은 영화를 통해 일찌감치 인간의 뇌 탐험에 일가를 이루었던 시나리오작가 찰리 카우프만이 손을 잡은 영화다. 이들의 조합만으로 영화가 보여줄 상상력의 수치가 우리의 기대 너머에 있다는 것쯤은 눈치챘을 것이다. 영화 속에는 “고통 없이 기억을 지워주는 병원- ‘라쿠나’ (Lacuna Inc.)”가 등장하는데, 이 병원은 귀엽게도 마치 실재하는 병원처럼 인터넷 웹사이트를 만들어 놓았다. 이 가상의 사이트는 헌 기억을 잊고 새 사람과의 달콤한 시간을 보내라며 천연덕스럽게 할인쿠폰을 첨부해놓기도 하고, 다가오는 발렌타인 데이를 겨냥한 특별 세일도 하고 있다. 그리고 환자(!)의 상태를 테스트 할 수 있는 설문도 있는데, 그 단순한 설문들에 하나 하나 대답을 해나가다 보면 자신이 과거나 기억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실감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고통스런 기억도 우리 삶의 일부분이다, 라는 말을 자주 한다. 어쩌면 그것은 체념에 의한 긍정일지도 모른다. 어떤 기억들은 연필로 쓰건, 유성 펜으로 쓰건 간에 지우려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으니까. 하여 그렇게 절대로 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런 기억들은 평생 옆에 두고 가는 거다. 평생 짊어지고 가는 거다. 10cm 옆에서 상태를 확인하면서, 등에 올려진 무게를 느끼면서, 평행선을 그리며, 추슬러 업으며 묵묵히 함께 가는 거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사랑의 기억을 매장 했던 곳. 영화에 중요배경으로 등장하는 몬탁(Montauk)은 뉴욕주 롱 아일랜드 끝에 위치한 등대가 있는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맨하탄에서 기차를 타면 3시간 정도면 다다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나 역시 조엘이 그랬던 것처럼 훌쩍 기차를 잡아 타고 그곳으로 떠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망각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자꾸만 많은 것을 잊으려고만 하는 알뜰한 나의 뇌에게 대한 아부가 될 것이다. 조금만 더 간직하고 있으라는, 조금만 더 괴롭혀 달라는, 간사한 기억에 바치는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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