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해, <어린 신부>를 시작으로 한국 영화계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조폭 아저씨들과 80년대 오빠들의 틈바구니를 헤치고 “나는 사랑을 아직 몰라”라며 깜찍하게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들의 등장. 이 소녀들은 더이상 첫사랑에 눈물을 머금는 순진한 십대도, 그렇다고 제도와 세상물정을 꿰뚫는 속세의 여인도, <나쁜 영화>나 <눈물>에서처럼 사회의 극단을 체현하는 ‘주변부’ 아이들도 아니다. 그렇다면 소녀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백지의 표정을 지으며 그 무거운 제도와 사랑과 성을 단순한 종잇조각 혹은 게임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것일까? 철없음을 무기로 사실은 매우 영악하게 거대 담론을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 진지함으로 포장된 제도, 사랑, 성의 이면에는 아무런 본질이나 진리가 존재하지 않음을 자신들만의 언어로 조롱하고 있는 것일까?
아쉽지만 위의 의문은 단지 기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기대를 실현하기에 소녀들은 여전히 진부함과 순종의 울타리를 맴돌고 있다. 금기를 ‘말한다’는 것이 곧 그것을 ‘사고한다’는 의미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처럼, 소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사랑과 성에 대해 조잘대지만, 그녀들의 ‘말’에는 아무런 울림이 없다. 소녀들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영화들이 이제는 꽤 다양해진 에피소드들과 함께 우후죽순처럼 쏟아짐에도 그 양에 비해 이러한 영화들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토대로 재생산되고 있다. 그 구조는 소녀와 섹슈얼리티간의 파격적인 만남을 억지로 순화시켜 ‘정상’의 범주에 끼워넣는 데 일조한다. 소녀와 섹슈얼리티는 서로를 도발하는 대신 서로의 날카로운 톱니바퀴들을 무디게 갈아서 새로운 기획 상품으로 변신한다. 조폭영화, 복고영화의 뒤를 잇는 <어린 신부> 속편들. 이러한 경향을 롤리타 콤플렉스와 같은 남성 판타지로 규정하기에는 영화의 주요 관객층이 소녀들 자신이라는 이유를 굳이 제시하지 않더라도 지나치게 단순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이 글은 소녀의 섹슈얼리티를 소재로 재생산되는 최근 한국영화의 흐름을 살펴보며 이 영화들의 화려한 껍데기를 벗겨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껍데기 속에 감추어진 지극히 상투적인 구조에 주목한다.
소녀의 섹슈얼리티를 소재로 펼쳐지는 최근의 영화들에는 대개 안전장치가 존재한다. 이것은 팔팔 뛰는 섹슈얼리티의 에너지 혹은 퇴폐와 고통을 넘나드는 그것의 그림자를 적당한 강도로 억제시키기 위해 이 영화들이 선택하는 배경의 문제이다.
안전장치1: 학교 제도 안의 소녀들에게 안착하는 섹슈얼리티
첫째, 섹슈얼리티의 담론을 학교 울타리 안에서 구성해내며 제도 안에서의 성장통을 강조한다. <어린 신부> <돈텔파파> <여선생 vs 여제자> <몽정기2> <여고생 시집가기> <제니, 주노>부터 <늑대의 유혹> <그놈은 멋있었다>에 이르기까지 소녀들은 교복을 입고 사랑하고 욕망한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임신을 하고(<제니, 주노>), 결혼을 하고(<어린 신부>) 거침없이 성담론 위에 올라 마치 표면적으로는 제도의 틀에 균열을 일으키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직 학교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아무리 성인의 범주를 침범하더라도 여전히 성인이 아니라는 사실, 그 어떤 욕망도 철없음으로 용인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학교라는 제도가 성장기의 ‘아이들’에게 선사하는 너그러움이다. 그것은 학교 안 소녀들의 욕망은 어차피 사회에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안전장치2: 낭만적인 로맨스로 중화되는 섹슈얼리티
둘째, 위와 같이 학교 안 소녀들의 욕망에서 전복성을 제거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녀들의 섹슈얼리티를 로맨스로 중화시키는 것이다. 선생님에 대한 짝사랑이건(<몽정기2> <어린 신부> <여선생 vs 여제자>), 동갑내기를 향한 사랑이건 그 사랑에는 언제나 쓴물이 빠진 낭만적인 단물만이 남는다. 소녀들의 성적 욕망은 선생님의 탈을 쓴 자상한 젊은 오빠로 향하는 과정에서 싱싱함을 잃고 인생에 대한 깨달음으로 승화된다. 예컨대, <몽정기2>의 은비나 <어린 신부>의 보은, <여선생 vs 여제자>의 미남은 그녀들의 욕망이 애초 영화적으로 재단된 것이었다 해도 막무가내로 방방 뛰는 힘이 있었지만, 결국은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거나 소중한 것은 멀리 있지 않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정리한다. 혹은 <그놈은 멋있었다>나 <늑대의 유혹>에서처럼 소녀들의 욕망은 모성에 대한 남자아이들의 욕망에 흡수되어 사랑의 이름으로 포섭된다.
그녀들의 섹슈얼리티는 밖으로 흩어지지 않고 차오르는 순간 내부로 봉합된다. 소녀들은 그렇게 성숙한다. 그녀들의 섹슈얼리티는 어찌 되었건 로맨스를 완성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동안 소년의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재현되었는가? 소년들의 성은 거친 말투와 다양한 방식(도색잡지, 비디오부터 자위를 위한 기상천외한 수단들)을 통해 노골적으로 제시되어왔다. 남학생들은 사랑이 아니라 섹스를 꿈꾼다. <몽정기>에서 로맨스의 환상에 시달리는 사람은 소년들이 아니라 그들의 여자 교생(김선아)이었다. 그녀는 소년들의 완벽한 ‘캔디’(영화에서 이 단어는 그들의 성적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을 일컫는 은어이다)로 존재하지만 그녀는 정작 키스 한번 못해보고 운명적 사랑만을 되풀이하는, 꿈만 먹고 사는 여자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안전장치3: 가족이나 운명의 보호를 받는 섹슈얼리티
셋째, 소녀들의 섹슈얼리티는 학교뿐만 아니라 무방비하게 노출된 그녀들의 성을 정리정돈시켜주는 가족, 운명의 보호를 받는다. 그녀들은 자기 욕망의 자율적 주체가 아니다. 그녀들은 자신이 욕망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존재들이다. <어린 신부>에서 소녀의 결혼은 할아버지의 유언으로, <여고생 시집가기>에서는 평강공주 설화를 바탕으로 한 운명적 선택으로 정당화되고 있다(뿐만 아니라 드라마 <낭랑 18세>나 <쾌걸 춘향>에서도 그녀들의 이른 결혼은 언제나 자기 결정권 밖에 존재한다). 소녀들은 교복을 입은 채, 어느 순간 유부녀가 되어 있다. 소녀의 결혼은 조선시대로 돌아가 21세기로서는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이유에 의해 당시의 방식으로 아무런 무리없이 진행된다. 소녀들은 부모의 뜻을 거역할 수 없고, 하늘의 뜻을 피할 수 없고, 심지어 새 생명을 죽일 수 없어서(<제니, 주노>) 사랑의 끝, 결혼으로 골인한다. 이 21세기의 심청이는 도대체 누구 욕망의 산물일까. 이 영화들은 결혼이란 이같은 고지식한 무지함 속에서만 가능한 제도임을 소녀들의 섹슈얼리티를 전유하며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
이처럼 기존의 가치, 관습을 자신의 욕망과 동일시하는 소녀들이 자기 몸의 소리에 민감할 리 없다. 예컨대, <몽정기2>에 등장하는 세명의 소녀들에게 섹스는 남성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다. “너, 섹스 해봤어?”는 곧 “너, 어른이야?”의 의미로 직행한다. 그에 따라 그녀들이 그 무지한 성적 지식으로 집중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상대 남자의 성기를 발기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절박한 고민이다. 이것이 남성감독 자신의 욕망인지, 혹은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진 환상인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이 소녀들의 섹슈얼리티란 고작 ‘그들’의 남근이 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운명의 남자를 위해 남근이 되려고 그토록 ‘사고’하면서도 자위의 문제에서는 “걱정 마, 그건 유행이야”라며 안심하는 소녀들. ‘나의 욕망’을 모르는 소녀들, 내가 나의 욕망을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소녀들 덕택에, 그리고 그녀들을 감싸주는 제도와 운명 덕택에 그녀들의 섹슈얼리티는 그야말로 하나의 유행이 되고 만다.
안전장치4: 결함을 내세워 변명하는 섹슈얼리티
넷째, 위와 같이 결혼으로도, 낭만적 로맨스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소녀들의 성은 비정상적 환경의 산물로 재현되며 결함의 논리와 결부되고 있다. <귀여워>와 <여선생 vs 여제자>의 어린 소녀들은 각 영화의 성인 여자보다도 성숙하고 당돌한 이미지로 나타난다. <귀여워>에서 예지원과 경쟁하는 소녀는 억척스럽고 천박한, 전형화된 주변부 여자의 이미지를 모방한다. 소녀는 성인 여자와 함께한 남자를 욕망하고 소주를 마시고 화장을 한다. 학교, 가족, 또래집단 모두로부터 분리되어 홀로 존재하는 듯한 소녀의 모습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밍키와 유사하다. 현실에 발을 딛지 않은 환상 속의 어린 마녀처럼 그녀의 이미지는 그로테스크하다. 그런데 아이의 얼굴로 성인의 섹슈얼리티를 능숙하게 흡수한 소녀는 어김없이 철거촌이라는 주변부가 만들어낸 결과물로 재현된다. 그녀는 부모 없이, 가족 없이, 든든한 울타리 없이 방치되어 되바라진 존재, 불행한 미래가 뻔하게 상상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어린 소녀가 성인의 섹슈얼리티를 모방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성적 의미로 읽혀지지 않는다. 다만 어른을 따라하는 위험한 아이, 성장의 ‘정상적’인 도로를 일탈한 아이로 규정된다.
한편, <여선생 vs 여제자>에서는 염정아보다 전략적이고 성숙하게 남자를 유혹하는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는 도도한 방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최대한 이용하며 상대방의 욕망을 읽어낸다. 그러나 등장인물들 중 가장 어른스럽게 보였던 소녀 역시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엄마와 단 둘이 어렵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소녀의 영리함은 더이상 성숙함의 표상이 아니다. 그녀는 사랑과 관심의 결핍에 시달리는 아이로 추락한다. 소녀가 그토록 집착했던 미술 선생님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가 없는 아이의 대체 욕망으로 규정되어 사그라진다.
이는 <몽정기2>에서도 나타나는 바, 아버지는 여주인공으로 하여금 교생 선생님에 대한 복합적인 심정과 그녀의 혼란한 섹슈얼리티에 질서정연한 논리를 부여해주는 존재이다. 그녀는 마치 왕자와 공주처럼 아버지와 춤을 추며 동화 속에서 방황을 끝낸다. 그러니까 소녀들은 아버지와 유사 아버지들에 둘러싸여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한순간 매듭짓는 법을 끊임없이 연습하는 것이다. 소녀들의 성은 아버지의 상실을 또 다른 아버지로 채우길 반복하면서 폭발하려는 순간 가라앉는다. 섹슈얼리티의 중심에는 ‘내’가 아니라 ‘그’가 존재하고 ‘그’ 또한 위험수위마다 경보음을 울리며 가족, 로맨스, 운명 등을 제시하는 기계 같은 존재이다. 소녀들은 마치 근친상간 금기의 경계 위에서 매순간 교묘하게 그 금기를 넘어서지 않으며 그와 동시에 서서히 자신의 욕망에 귀기울이는 법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소녀=성=사랑=결혼, 완결된 서사에 대한 집착
이제 소녀들의 섹슈얼리티를 다룬 이 영화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소녀들의 몸이다. 그 몸에 대한 사유이다. 결혼, 사랑, 성적 욕망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도 그 에피소드들이 여전히 판타지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마는 이유는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수놓는 결혼과 사랑에 대한 온갖 환상들과 그야말로 성교육 시간에만 배우는 ‘건강한 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모자이크처럼 짜맞춰져 있을 뿐, 거기에는 몸에 대한 세밀한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의 감독이 공교롭게도 모두 남성이라는 사실을 제시하기보다는(예컨대, ‘남자는 여자의 섹슈얼리티를 모른다. 여자의 욕망을 알 수 없다’ 등) 이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완결된 서사에 대한 집착을 지적하고 싶다. 이러한 서사 구조상의 문제는 소녀들과 섹슈얼리티의 담론에서만큼은 그 내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소녀들의 성이 축 늘어진, 이미 시들어버린 꽃처럼 힘을 잃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로맨스 혹은 결혼에 안착한 까닭은 이 영화들이 보이는 여성의 성에 대한, 특히 소녀들의 성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완성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가. 위의 영화들은 이에 대해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남녀를 불문하고 성이라는 것이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완결의 구조를 지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물론, 소녀=성=사랑=결혼이라는 도식 자체에도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최근 이러한 영화적 경향들에서 언제나 이슈가 되었던 것은 ‘소녀’가 성을 말하고 결혼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소녀’의 결혼은 그다지 놀라워할 만한 부분이 아니다. 문제는 소녀에서 시작하여 결혼으로 이어지는 가부장제의 이 완벽한 도식, 다시 말해, 처녀에서 시작하여 엄마가 되는 여자들의 운명이 과거에 비해 좀더 노골적으로, 그러나 소녀의 섹슈얼리티를 ‘순진함’ 속에 가두고 전유하며 영악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의 영화들은 소녀의 섹슈얼리티에 기승전결의 구도를 부여하여 성이 결국은 정신적 성숙을 통해 제도에 안착하는 완벽한 질서를 구상해냈다. 그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란 한번의 성장통으로 완성되는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는 사유와 아픔의 과정임을 알지 못한다. 완전한 구조에 대한 그들의 욕망은 자연히 해피엔딩에 대한 강박을 낳으며 소녀들의 성에 억지로 코미디와 감상적인 눈물과 천진난만한 깨달음을 부여한다. 언제나 유사한 도식과 유사한 결말을 준비하는 이러한 서사에 동시대적 고민이 담길 리 없다. <몽정기2>에서처럼 소녀들은 어중간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여성의 성에 대한 온갖 뒤떨어진 클리셰들을 안고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몸에 대한 사유없이 진행되는 결혼, 임신, 사랑의 언어들 속에는 소녀들의 몸이 조각상처럼 존재할 뿐, 몸의 언어가 부재한다. 총체적 서사에 대한 강박은 통합된 몸, 통합적 질서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분리되고 흩어지는 소녀들의 섹슈얼리티를 읽어내지 못한다.
공포와 슬픔으로 귀환하는 소녀들의 섹슈얼리티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여고생들의 섹슈얼리티는 결코 ‘건강’하지 않았으나 아픈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성애와 동성애를 가로지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옥상의 끝을 오가던 조숙한 소녀의 몸은 내밀하게 떨렸다. 판타지의 공주가 되는 대신, 공포 속에서 몸의 슬픈 울림을 듣는 소녀들의 모습. 남성 중심적 사회의 수많은 아버지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말라가는 소녀들의 섹슈얼리티는 그렇게 유령이 되어 끊임없이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이 우울한 영화 속에서 자신의 몸으로 스스로를 언어화하며 몸에 새겨진 상처를 사유하는, 몸으로 말하는 소녀들을 본다. 로맨스와 결혼과 가족 대신 자신의 섹슈얼리티로 스스로와 내밀한 소통을 나누는 소녀들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