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막고 눈 가리면 정권의 안위가 지속되리라 판단했던 <그때 그사람들> 속의 등장인물들과 무엇이 다른가.” 문화연대,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민예총,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우리만화연대, 전국언론노조, 한국영화감독협회 등 7개 단체는 3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 대한 법원의 ‘조건부 상영 결정’은 소재선택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퇴행적 정치판단의 결과”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이들 단체는 성명서에서 “<그때 그사람들>의 3분50초가 검은 화면으로 처리된 채 관객에게 선보이게 됐다”며 “창작자들의 상상력을 시대에 걸맞지 않은 명령으로 가두고 시민의 눈을 가리려는 시대착오적 판단에 대해, 모든 시민단체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강경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 영화가 허구에 기초한 블랙코미디라면서도 삭제를 명령한 법원의 논리는 모순”이라며 “앞으로 진행될 법적 절차를 예의주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화적 성장 토대 흔드는 결정” 거센 비판
이들은 “한국사회의 문화적 성장은 말할 권리, 쓸 권리, 그릴 권리, 찍을 권리를 얻기 위해 지난 수십 년간 싸우면서 얻은 창조성에 바탕하고 있고, 이를 통해 동시대를 예술의 소재로 삼는 문화적 역량을 갖추기에 이르렀다”며 “그러나 법원의 이번 결정으로 그동안 어렵게 만들어온 문화적 성장 토대가 밑바닥부터 흔들고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이날 회견에는 원용진 문화연대 정책위원장, 최민희 민언련 사무총장, 양기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사무처장, 이민용 한국영화감독협회 부회장, 강성률 민예총 컬처뉴스 편집장, 현상윤 언론노조 부위원장 등 영화·문화·언론계의 인사들이 참석했다.
권용진 문화연대 정책위원장은 “문화예술에 대한 사법적 결정이 내려진 이후 창작이 위축된다는 사실은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며 “사법부의 결정은 문화 예술계와 문화 예술의 수용자들에게 아픔이고 상처가 됐다”고 말했다.
현상윤 언론노조 부위원장은 “사법부의 판단은 문화 예술에 대한 무지에서 나왔다”며 “한국 영화가 세계 영화제 등을 통해 이제 막 역량을 꽃피어 나가려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표현의 자유 시민대책위’ 구성해 범시민사회 차원 대처키로
이민용 감독협회 부회장은 “지금 상황은 문화예술계에서는 가장 큰 비상사태”라며 “사법부의 결정으로 창작행위의 가장 큰 걸림돌인 자체 검열이라는 마수가 다시 생겨날 것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들은 설 연휴가 지난 뒤 다른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표현의 자유 지키기 시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이 영화가 온전한 형태로 상영될 수 있도록 공동으로 대응에 나설 계획이다.
다음은 이들 단체가 발표한 성명서 전문이다.
법원은 <그 때 그사람들>의 조건부 상영 결정을 즉각 철회하라!
<그때 그사람들>의 3분50초가 검은 화면으로 처리된 채 관객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세 장면을 삭제하고 상영하라는 1월3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50부의 ‘조건부 상영 결정’은 권위주의적인 검열의 논리로 힘들게 얻어낸 소재 선택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퇴행적 정치 판단의 결과이다. 입 막고 눈 가리면 정권의 안위가 지속되리라 판단했던 <그때 그사람들> 속의 등장인물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한국사회의 문화적 성장은 성찰과 비판을 토대로 한 것이며, 그 뿌리는 정치적 강제가 아닌, 시민들의 자발적 저항과 민주화 요구에 있었다. 말할 권리, 쓸 권리, 그릴 권리, 찍을 권리를 얻기 위해 지난 수십 년간 싸워왔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지불하고 얻어낸 것은 스스로 판단할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이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예술도 검열의 족쇄에서 벗어나 창조적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동시대를 예술의 소재로 삼는 문화적 역량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이제 우리 영화는 분단의 고통을 소재삼고, 1970년대의 폭력을 그려내며, 1980년대 민주화 과정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영화들에 대해 관객들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 보다는 작품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과 평가에 따라 호응 여부를 결정한다. 앞으로도 관객들은 지속적으로 선보일 근현대 정치사의 시나리오를 기대 속에 기다리고 있으며, 이에 대한 판단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어렵게 만들어온 문화적 성장의 토대가 사법부의 시대착오적 명령에 의해 밑바닥부터 흔들리고 있다. 영웅 신화의 번성을 조장한 실존인물 미화에 지친 시민은, 그 인물에 대한 풍자라는 동전의 반대 쪽을 궁금해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지금까지의 선입견이 어디에서 근거한 것인지를 알려 한다. 그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재확인하게 될지, 비판적 시선을 강화할지는 전적으로 관객이 보고 판단할 문제이다.
‘<그때 그사람들>은 허구에 기초한 블랙코미디이고 영화상영으로 인해 고인에 대한 평가가 크게 바뀔 것 같지 않다’고 믿으면서 삭제를 명령한 법원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고 싶지 않다. <그때 그사람들>의 온전한 상영을 주장하는 것은, 시민의 문화적 성숙을 따라오지 못하는 사법부의 정신적 전근대성을 경계하자는 외침이며, 현대사를 좌지우지할 권력을 지녔던 한 인물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던 시민의 권리를 되돌려달라는 정당한 요구이다.
창작자들의 상상력을 시대에 걸맞지 않은 명령으로 가두고 시민의 눈을 가리려는 시대착오적인 판단에 대해, 제 시민단체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강경하게 대응할 것이며, 앞으로 진행될 법적 절차를 예의주시할 것이다.
2005년 2월3일
문화연대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민예총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우리만화연대 전국언론노조 한국영화감독협회 참가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