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앤 더 시티>의 마지막 시즌에서 낭만적인 러시아 예술가와 데이트하던 캐리는 그의 손에 이끌려 매일 새로운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어제는 이탈리아, 오늘은 프랑스, 내일은 한국. 고가의 비행기 티켓도, 골치 아픈 제트렉 걱정 없이도 이런 여행이 가능한 도시가 있으니 그곳은 바로 뉴욕이다. 리틀 이탈리아와 차이나타운이 등을 붙이고, 헬스키친을 따라 베트남과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주방이 군침 도는 냄새들을 풍겨대는 곳. “세계문화의 용광로 같은 도시”라는 전형적인 표현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곳은 그렇게 동시대의 세계를 시차 없이 만나는 익스프레스 창구다. 게다가 영화의 메뉴판은 더욱 이국적이고 화려하다. 내 방 벽에 빼곡이 붙여놓은 미술관 부속 극장들과 씨네마테크들의 봄 스케줄만 보더라도, 에드워드 양에서 고다르로, 아프리카 영화에서 미국 서부영화로, 박찬욱에서 루키노 비스콘티로, 국적과 시대를 종대로 횡대로 넘나들며 어찌나 상다리가 부러지게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는지 골라먹기가 힘들 정도다. 매일이 마치 세계국기가 그려진 회전비행기를 타는 기분이다. “독일비행기타고 얼른 한 바퀴 돌고 나서, 빨리 일본비행기로 갈아타야지!”
몇 일 전 날아간 영화의 도시는 멕시코 시티였다. 현재 필름 포럼에서 상영 중인 루이스 브뉘엘의 1950년 작 <잊혀진 사람들>(Los Olvidados)은 전후 세계, 그 동정 없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여준다. 비정한 도시에서 태어나 무관심 속에 자라나는 아이들은 사악하고 잔인하다. 앉은뱅이의 수레를 뺏고, 눈먼 노인에게 오물을 집어 던지면서도 이들은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은 아이들보다 580배는 더 잔혹하니까. 소년들은 학교에 가는 대신 주정뱅이 아버지의 술값을 위해 공사판에서 일해야 하고, 몇 페소를 벌기 위해 그 조막만한 손으로 대장간에서 뜨거운 칼을 두드리고 놀이공원 회전목마를 돌려야 한다. 어린 육체를 탐하는 거리의 중년남자를 피하기에도,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기에도 그들은 여전히 너무 작고 약하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이없이 착취당하고, 죽어가고, 그리고 잊혀진다. 이 절망적인 영화 끝에는 프로듀서의 요청에 의해 찍은 ‘해피엔딩’ 버전을 볼 수 있었다. 악마 같던 ‘자이보’가 마굿간에서 떨어져 죽자 50페소를 되찾은 페드로가 당당히 학교로 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희망적이어서 비현실적인 씬이였다. 페드로가 따뜻한 엄마의 품에 안겨 행복해하던 꿈의 장면 만큼이나.
그러나 아이들의 불행은 55년 전 멕시코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번 주말 맨하탄에서 개봉하는 코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 역시 21세기 부자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아무도 모르게 죽어간다. 무책임한 어른들과 무관심한 사회에서 트렁크 속 아이들은 부화되지 못한 채 질식사한다. 얼마 전 모마에서 특별 상영된 스파이크 리의 신작 <서커 프리 시티>(Sucker Free City)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총과 마약,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이 위대한 아메리카의 흑인아이 역시 한발의 총성과 함께 살해되고 아무도 모르게 “내 심장을 두고 온 샌프란시스코”의 밤바다에 수장된다. 일전에 소개했던 <매음굴에서 태어나다>에서 인도 매춘거리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알모도바르의 <나쁜 교육>에서 아무도 모르게 성적으로 학대 당했던 소년에게도 어른들은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저 “저것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버렸어야 하는 존재”라며 저주에 찬 욕설을 퍼부었을 뿐이다. 어쩌면 나 역시도 이 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어느 3세계 어린이들의 고사리 손으로 만든 운동화를 신고 있는지도, 그들의 노동으로 짜낸 청량음료를 마시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니까.
멕시코 시티의 아이들에게도, 스페인의 아이들에게도, 인도의 아이들에게도, 심지어 일본과 미국의 아이들에게도 세상은 공평하게 잔혹하다. 그리고 이 고통의 시기를 견디고 생존한 아이들은 더 무시무시한 악마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가슴 답답해지는 영화여행을 연달아 다녀오고 나니 진이 빠진다. 보호 받고 사랑 받아야 마땅한 아이들이, 아무도 모르게 어느 골방에서, 쓰레기 더미 속에서 죽어 갈지도 모르는 세계. 희망을 이야기 하기 위해선 나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눈을 감고 보지 않는. 귀를 막고 듣지 않는. 그렇다면 영화보기를 멈추어야 하는데 그럴 수도 없다. 문화적으로 축복 받은 이 섬에 내려진 비극이 있다면 이 도시의 어둡고 추한 얼굴과 목소리 역시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저 이 순간, 세상에 대한 무력함이 냉소로 변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