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말아톤> 제작한 시네라인-투 대표 석명홍
2005-02-07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정진환
“영화제작에 두번은 없다”

영화사 시네라인-투의 석명홍 대표는 90년대 중반까지 뛰어난 영화 카피라이터로 유명했다. <유주얼 서스펙트>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샤인>처럼 한국에서 흥행하기 쉽지 않았을 영화들이 그의 손을 타고 좀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었다. 2500편이라는 전설적인 숫자의 영화를 마케팅했던 그는 지금은 직접 영화를 만드는 제작자다. 출발은 축복을 받은 듯 보였다. 석명홍 대표는 첫 번째 영화 <친구>로 8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고, 흥행을 넘어, 문화적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애정과 야심을 가지고 기획한 영화 <청연>은 끝도 없이 늘어나는 제작비와 촬영기간, 재앙을 예고하는 불길한 소문 끝에 제작사가 바뀌기에 이르렀다. 이제 그가 눈앞에 둔 영화는 <말아톤>. 1년 반 가까운 취재와 시나리오 집필 기간을 거쳐 시작된 <말아톤>은 자폐아가 마라톤을 통해 세상과 교감하는 드라마와 안정된 연출, 배우들의 호연에 힘입어 개봉 전에 이미 호감을 얻고 있다. 불운을 거쳐, 새로운 길을 향해 발을 뗀 석명홍 대표를 충무로 생활 20년 만에 만났다.

-4년 만에 만든 <말아톤>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공공의 적2>와 맞붙게 돼서 불안하지 않은가.

=예매상황이 어떤지 정확하게는 모르겠고, 괜찮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경쟁을 피할 수는 없다. 극장에서 다양하고 좋은 영화들을 많이 볼 수 있다면 관객 수도 늘지 않겠는가. 그리고 <말아톤>은 처음부터 설을 겨냥했기 때문에 <공공의 적2>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리라고 예상했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는데도 촬영일정을 어기지 않고 계획대로 개봉할 수 있어서 만족할 뿐이다.

-<말아톤>에 영감을 준 실화를 직접 발굴했다고 들었다. 상업적인 소재는 아닌데, 어떤 점에 끌렸는가.

=2, 3년 전쯤 조선일보에서 박미경(배형진씨의 어머니)씨의 수기 <달려라! 형진아>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그때 헤드라인이 “내 아이가 나보다 하루 먼저 죽는 게 소원”이었다. 엄마 마음이 얼마나 절절했으면 그랬겠나 싶어서 스크랩을 해두었다가 정윤철 감독에게 영화로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자폐아가 서브 스리(마라톤 풀코스 42.195km를 세 시간 안에 완주하는 것)를 해내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 아이가 서브 스리를 해낸다고 해서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처럼 경제도 어려운 시대에 말이다. 그리고 그 어머니에게 공감한 부분도 컸다. 어머니는 아이를 키우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역경을 겪었고, 그건 모든 어머니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실화를 소재로 하는 한국영화 대부분이 과거 이야기만을 하지만, <말아톤>은 지금도 문정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실화라는 점이 매력적이다.

-<말아톤>은 드라마틱한 재미를 주기에는 힘든 한계를 가지고 있다. 회사 상황도 좋지 않아서 걱정됐을 법도 한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현재 상황을 체감온도로 느낀다.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힘든 시절엔 가족만이 희망을 줄 수 있고, 그런 계산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원래 가족영화를 좋아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대부>인데, 그 영화는 표현은 험악해도, 근저에는 가족주의가 깔려 있다. 가족 간의 끈끈한 정이나 자식을 향한 사랑은 한국을 따라올 수 없지 않은가. 또 하나 불경기에 희망을 주는 소재는 옛날이 좋았다는 회귀본능이다. 그래서 만든 영화가 <친구>였다.

-<친구>는 시네라인-투가 제작한 첫 번째 영화인데도 800만명 넘는 관객을 동원하는 놀라운 성공을 기록했다. 어떻게 제작하게 됐는가.

=1998년 제작을 시작하면서 프로젝트 다섯개를 준비했는데 모두 엎어졌다. 그리고 내 경험을 살려서 <선배>라는 영화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 선배의 시선으로 고등학생 네명을 바라보는 영화였는데, 현경림 PD가 괜찮은 시나리오 초고가 있다고 해서 <친구>를 봤더니, <선배>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내가 곽경택 감독보다 나이가 좀 많아서 시대는 달랐지만. 후반부는 곽 감독의 시나리오를 살리고 전반부 고등학교 시절 에피소드는 내 아이디어를 많이 넣었다. 요즘 아이들 우정은 우리 때와 다르지 않나. 우리는 뒷골목에서 가방 던지고 받는 장난만으로도 정이 쌓였는데, 요즘 애들은 학원가느라 바빠서 인터넷으로 스킨십을 대신한다. 30, 40대뿐만 아니라 10대 후반, 20대 초반 관객도 <친구>가 자기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건 우정이나 의리를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어서가 아닐까 싶다. 사실 준석이나 동수도 끝까지 우정을 저버리진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에피소드에 자신의 경험도 들어가 있나.

=내가 중학교 때부터 유도를 했고 십대 후반엔 권투도 했다. 지금 나를 보면 안 믿겠지만 예전엔 몸이 좋았다. (웃음) 껄렁한 친구들이 많아서 곧잘 어울려 다녔고, 음악하는 친구들하고는 좀 심하게 놀았다. 그래도 집안이 워낙 독실한 크리스천이어서 비뚤어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고등학교 2, 3학년 때는 반장도 했고, 글쓰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내가 이과였는데, 적성이 아니다 싶어서, 삼수까지 해서 미대 시각디자인과에 갔다.

-단성사에서 포스터 디자이너와 카피라이터로 영화를 시작한 것은 그런 취향 때문이었나.

=가장 큰 이유는 월급이었다. 대학교 4학년 때 단성사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그대로 입사했는데, 당시 대졸 초봉이 30만원 조금 넘었던 것에 비하면, 월급이 매우 많았다. 그 무렵엔 기성세대가 영화에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교수들은 말렸지만, 몇몇은 미개척 분야를 해보는 것도 좋다고 격려해줬다. 나도 동기들처럼 제일기획이나 LG애드에 가서 쟁쟁한 인력과 경쟁하느니 영화 마케팅을 개척해보고 싶었다. 그땐 포스터를 찍는 포토그래퍼도 없었고 그래픽을 전공한 사람도 없었다. 한국 영화계가 워낙 보수적이어서 비용 추가를 겁내기도 했고. 그래서 일반광고 이론을 공부한 다음 영화 마케팅에 접목시키고, 스스로 시행착오도 거치면서 공부를 했다. 나는 카피를 쓰면서 다른 사람 하루 고민하는 동안 이틀을 고민했다. 결과는 노력에 비례하는 것 같다. 17년 동안 마케팅을 하면서 바로 비디오로 출시된 영화까지 2500편 정도 일을 했는데, 광고로 사기도 많이 쳤지만(웃음), 소비자 기호와 취향을 파악할 수 있어서 제작에 도움이 됐다. 씨네월드 이준익 대표와 신씨네 신철 대표, 명필름 심재명 대표 등이 마케터 출신인 데는 이유가 있을 거다.

-피카디리의 이준익, 서울극장의 신철과 함께 젊고 능력있는 마케팅 인력으로 유명했다. 굳이 위험한 제작에 뛰어들 이유는 없었을 텐데.

=극장에서 일하다보니 한계가 있었다. 잘난 척 같지만 나는 1년에 100편도 마케팅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편수는 거기에 훨씬 못 미쳤으니까. 이준익 감독과 영화 마케팅 회사 시네시티를 차려서 함께 일하다가 헤어지고 시네라인을 만들었다. 많을 때는 한달에 열세편까지도 마케팅을 해봤다. 그러다보니 지쳤고 신경도 예민해졌다. 그리고 보람이 없었다. 남의 일만 해주기보다 내일을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심정 있지 않나. 남이 제작한 영화 마케팅 하다보면, 나는 저렇게 제작 안 할 텐데, 하는 심정이 드는 거. 그래서 제작사 시네라인-투를 만든 거다. 사람들은 ‘투’가 뭐냐고 많이 묻는데 그냥 마케팅 회사 시네라인을 먼저 만들어서 회사 이름이 그렇게 됐다.

-제작을 하면서 아픔도 겪었다. 얼마 전에 <청연> 제작사가 바뀌었는데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건가.

=제작비 계산을 잘못했고, 그 정도 규모의 제작비를 투자받기도 힘들었다. <청연> 개발기간이 길다보니 <친구> 이후에 오래 쉰 셈이 되어서 투자사와 교류가 별로 없었다. 애초 <청연> 정도 규모의 영화를 60억원 이내에 찍으려고 했던 게 무리였다. 현장 여건도 불리했고 감독 욕심도 있었지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순제작비가 100억원 정도 될 것 같으니 너무 오버한 거다. 오버된 제작비는 내가 구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구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투자사 코리아픽처스가 자체 제작을 하고 있다. 나는 모든 권리와 의무를 포기했고, 기획자로 타이틀에 올리겠다는 제안도 거절했다. 충무로에서 내가 <청연>을 제작하다가 엎어진 거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다른 사람 보기에 좀 그랬다. 그리고 제작비가 오버되면 제작자도 잘릴 수 있는 선례를 남겨야겠다고도 생각했다. 그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었으니까. 정말 마시고 싶지 않은 쓴잔이었는데 단숨에 들이켠 거다.

-어떤 부분에서 가장 많은 착오가 있었는가.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 로케이션 장소를 찾기가 힘들었다. 세트를 지어야 했고,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복엽기도 만들어야 했다. 항공촬영 노하우와 인프라가 전무해서 미국으로 가야 했던 것도 있고. 제작비가 가장 많이 오버된 부분은 중국 촬영 분량이었다. 그 무렵 비행장이 한국과 일본엔 없어서 중국 창춘(長春)의 버려진 비행장에 오픈 세트를 만들었다. 다른 영화들이 해외 로케이션을 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는데, 중국은 법이 아니라 사람이 다스리는 국가더라. <청연>을 만들면서 얻은 교훈은 의욕이나 패기만 가지고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는 점이다. 내 좌우명이 ‘두번은 없다’가 됐다. 잘못 계산한 제작비는 두번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뜻에서.

-<청연>은 시네라인-투에서 개발해 윤종찬 감독을 영입한 프로젝트인데 아쉬움이 많겠다.

=<청연>은 아무것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는 프로젝트였다. 양국석 PD가 우연히 라디오에서 여류 비행사 박경원 이야기를 듣고 아이디어를 가지고 왔다. 1930년대 이야기고, 자료조사가 필요할 것 같아서, 이인화 교수에게 시나리오를 의뢰했다. 일본에 다큐 소설 두권이 나와 있던 걸 번역해서 참고했고. 이인화 교수가 골격을 잘 잡아준 시나리오를 윤종찬 감독이 영화에 맞게 고쳤고 분량도 좀 줄였다. 멜로 부분이나 마지막 비행장면은 픽션이지만 박경원의 사연은 워낙 극적인 실화였다. 내 아이디어도 많이 들어갔다. <청연>으로 경제적인 손해뿐만 아니라 이미지에도 데미지를 입었지만 지금도 내 자식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말아톤>으로 손해를 만회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웃음)

-다행히 <말아톤>은 호평을 받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촬영 도중 스탭들 사이에 불화가 있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다.

=충무로 생활이 20년인데 웬만한 소문엔 끄떡도 안 한다. 윤종찬 감독이 중국에서 <청연>을 찍다가 몸이 안 좋아 잠깐 귀국했을 때는 암에 걸렸다는 소문이 퍼졌을 정도다. 나도 <말아톤>에 관한 소문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현장에서 본 바로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소 불화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촬영기간이 3개월밖에 되지 않아 감독과 프로듀서는 일정을 먼저 맞추려고 했을 테고 촬영감독은 미장센에 욕심을 냈을 테니까. 나는 현장에서 가장 고민하는 사람은 감독이라고 믿는다. 감독이 고민하는 부분은 믿어줘야 한다. 그리고 <말아톤>은 내가 미안할 정도로 촉박하게 촬영했으면서도 아쉬운 부분보다 좋은 부분이 많다. 신인감독이 그 짧은 시간에 이 정도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예뻐 죽겠다. (웃음) 배우들도 복이었다. 조승우라는 걸출한 배우를 만났고, 김미숙과 이기영도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다. 그들은 모두 때묻지 않은 순수한 느낌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영화는 무엇인가.

=먼저 1970년대에 있었던 실화를 소재로 한 <뭉치>(가제)라는 영화가 있다. 뭉치는 넝마주이 은어로 엄마라는 뜻이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소년이 넝마주이가 되고, 비행청소년을 수감하는 성감도라는 섬에 갇혔다가, 엄마를 찾아 몇번 실패 끝에 탈출에 성공하는 이야기다. 성감도는 일제시대부터 청소년 감옥이 있었던 곳이어서 지금도 이름 모를 유골이나 무덤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이인화 교수의 소설 <하비로>를 각색하고 있다. <하비로>는 내가 아이템을 주고 이인화 교수가 소설로 먼저 쓴 작품이다. 1930년대 상하이에 독립군만 갔을까, 조선인 깡패도 있고 조선인 형사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이야기인데, 소설보다는 영화가 쉬울 거다. <광대>는 오래 전부터 준비해오던 영화다. 몰락한 서커스단의 광대가 주인공인데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실화가 많고 과거가 배경인 경우가 많다. 제작자로서 취향인가.

=나는 영화를 통해서 휴머니즘을 전달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는 다소 보수적일지도 모르겠다. <대부2>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도 그 영화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이탈리아 이민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편수에는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평생 좋은 영화 열편만 만들어도 족하고, <친구> <말아톤> 그리고 어쩌면 <청연>까지 어느 정도는 했다고 생각한다. 아, 영화와 뮤지컬을 결합한 새로운 형식의 공연을 기획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다. 내 부모님은 나에게 많은 끼를 물려주셨다. 아버지는 기타와 풍금 같은 악기 몇 가지를 연주하셨고, 어머니는 노래를 잘하셔서 여든이 넘은 지금도 음정 박자 한 번을 안 틀리신다. 그 끼를 활용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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